최근까지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두 나라간 역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함께 풀어가야 될 숙제다. 과거 조선의 유교문화 속에서 두 나라 간 통신사절단을 통한 교류는 오늘날 양국의 관계를 풀어가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조선의 통신사는 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년간 12회 방문이 이루어졌다. 통신사는 사절단 대표인 정사(正使)와 함께 관료, 화원, 의원, 악사, 역
전통시대 공동체 운영을 위한 일반적인 모임 형태 중 하나가 ‘계(稧)’이다. 계는 주로 작은 공동체 단위로 형성되므로 ‘동계(洞契)’로 범칭되고, 내용에 따라 송계(松稧), 산제계(山祭稧), 혼구계(婚具稧), 상구계(喪具稧)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운영된다. 이들은 모두 향약 정신에 기초하여 규약을 정하고, 회원들의 회비를 자본금 삼아 대출로 이자를 취함으로써 회를 유지하였다. 회원은 단위지역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하는데, 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회원간의 신뢰와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충청남도 공주에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
충청유교 하면 김장생, 송시열, 윤증, 유계, 권상하, 한원진 등의 인물이 떠오른다. 이들은 17~18세기 성리학의 대가들로 한 시대의 사림을 대표하던 사람들이다. 한편 전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없지만 19세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해 전국적으로 저명했던 충청지역의 유학자도 있었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가 바로 그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에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충청도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김정희는 19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국내는 물론이고 청국으로부터 두루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그
세종시 장군면 금암리, 금강변 한 자락을 뚝 잘라 기암절벽이 병풍을 친 ‘창벽(蒼壁)’이 있고, 그 물 건너에 강기슭에 ‘금벽정(錦壁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윤선거, 윤순거, 윤증, 송시열 등 당대의 걸출한 명현들이 앞다투어 절경을 노래하고,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 사송정(四松亭), 독락정(獨樂亭)과 함께 금강의 대표적인 정자로 이름을 올렸으니, 한때의 영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그러나 이 정자는 19세기 말에 헐려 사라졌다. 이후 새로 지었으나 여러 차례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다가 현재는 도로 공사로 흔적을 찾을 수 없
박물관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명기(明器)’이다. 명기는 자기로 작게 만든 그릇이나 항아리 형태가 일반적인데, 자기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인 용(俑)을 함께 넣기도 한다. 이러한 부장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도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무덤에 넣는 것이다. 이처럼 내세의 평안을 기원하는 행위는 곧 생전에 못다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라도 다하려는 지극한 효의 발현이다.논어에 ‘신종추원(愼終追遠)’이란 말이 있다. 부모의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나아가 대가 먼 조상에게도 추모의 예를 다해야 한다는 뜻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나와 서산시청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교천이 있다.대교천을 지나 300m를 가면 음암면 한다리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한다리 마을 안에는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유명한 정순왕후의 생가와 김기현 가옥이 있다. 시도기념물 68호로 지정된 정순왕후 생가의 안내판에는 ‘측면 2칸, 정면 5칸의 몸채 좌우로 각각 3칸씩 달아내어 ㄷ자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 지붕은 모두 홑처마 맞배 지붕을 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필자는 건축학이나 지리학에는 문외한이어서 이 고택이 가지는 공간적 입지나 건축 구조의 특징에 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한말 의병과 독립운동사에서 충청출신 지사는 빼놓을 수 없다. 을사조약에 항거를 주도하다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쓸쓸히 숨진 최익현, 일본의 국권강탈 이후 만주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장을 지낸 이동녕, 헤이그특사 활동과 대한광복군정부 설립을 주도한 이상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김좌진,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을 투척하고 총살당한 윤봉길, 3·1운동 여성독립운동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유관순 등이 바로 그들이다.왜 충청권에서는 우리 한국
유명 사찰이나 서원, 향교는 문화재탐방 프로그램으로 많이 찾는, 대표적인 우리 전통문화유산이다.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는 수려한 주변 경관이 주는 여유로움과 고즈넉한 정취, 전통을 온전히 담은 건축물에서 옛사람과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를 포함한 옛것들이 간직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오랜 역사를 간직한 것일수록 그러하다.서원과 향교는 교육과 선현배향을 통해 인재양성과 유교적 사회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한편으로 지역사림의 학문적·정
최근 충청의 미래정체성을 확립하여 범충청권 공동 브랜드를 구축하고 ‘세계 속의 충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역사적으로 환황해 문명교류의 중심지이자, 한반도 동서 및 남북교류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충청권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비전을 고민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충청의 정체성을 논의하는데 ‘충청도 양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충청도를 일컬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외적의 침략 앞에서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청의 산림
2019년의 설날이 머지 않았다. 매년 명절만 되면 주요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제사’이다. 제사 상차림의 방식부터 제사상 평균 비용, 제례의 존치 논쟁까지 제사에 대한 다양한 보도가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교문화의 장구한 역사가 우리 삶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인문주의 즉, 유교의 원형을 만든 공자는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신(神)에 대한
매일 언론기사를 보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나타나고 있다. 유교문화는 자기수양을 통해서 인간의 탐욕을 극복할 것을 강조해왔으며, 인간관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왔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충청유교 가치의 재발견은 그래서 중요하다.충청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청의 주요 유학자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목은 이색,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남당 한원진, 추사 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