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빈과 조개는 진원달의 말을 새겨듣고도 여러 번 머리를 숙이고 계속하여 간청하였다. 이에 진원달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말하기를“정 그러시다면 내가 시험 삼아 글을 한 장 적어서 사람을 보내 보리다.”진원달은 점잖게 장빈의 뜻에 따르겠다고 허락하고 장빈일행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고된 일정을 소화한 탓인지, 잠자리가 편안한 탓인지, 산속의 공기가 맑은 탓인지 장빈일행은 모처럼 단잠을 잘 수 있었다.날이 새어 서봉루에도 새들이 찾아와 울어대고 태양은 검은 숲의 이슬방울을 희롱하였다. 진원달의 글을 가진 사람이 산을 내려갔다
장빈은 왕복도가 써 준 서장을 받아 갈무리하고 진원달의 두 아들을 따라 가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괴도들에게 시달려 고단한 몸이라 일행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늦잠이 든 장빈일행은 숲속 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왕복도가 베풀어 준 아침상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진원달의 두 아들이 서둘러 떠나자고 재촉했다. 장빈은 왕복도와 헤어지며 예의를 다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대인의 은혜는 넘치는 광영이었습니다. 이제 진원달 어른을 찾아가 뵙고 그 후 일이 잘 풀려서 자리를 잡게 되면 서장을 보내어 오늘 우리에게 베
이렇게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낸 왕복도는 장빈일행이 흑망판에서 만난 도적 떼의 괴수에 대하여 그 내력을 풀어 놓기를‘흑망판의 수괴는 기안이란 사람으로 호를 벽안표라 하는데 용맹이 절륜하였다. 본래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란 탓인지 독살스럽고 매몰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벽안표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힘과 재주를 겨루며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남과 싸우다가 지면 거금을 드려서 창봉술을 습득한 후 상대를 이겨내고 마는 성정의 소유자였다.그러던 그가 마침내 작당을 지어 멀고 가까운 고을을 쏘다니며 난봉꾼이 되었다. 그
한편 괴도들을 보내고 장빈일행과 싸우던 9척 괴수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이 놈들아! 물러가지 않고 항거할 테냐? 목숨이 아깝거든 썩 물러가거라. 우리가 너희 목숨을 빼앗으려면 식은 죽 먹기다. 어서 칼을 거둬라!”장빈이 괴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해도 병장기가 부실해서 적도와 대적하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빈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자, 여러분. 그만 싸움을 멈추게! 싸워 봤자 물건은 찾을 수 없게 됐어.”이 말에 장경일행이 모두 싸움을 멈추자 괴수도 무기를 거두고
흑망판은 글자가 말해 주듯이 사람이 사는 집이 없고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 벌판 넘어 언덕바지에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음산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벌판과 숲속은 고요하기 짝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괴이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장빈일행은 날이 저물자 갈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버들나무 숲속에서 고각소리를 울리며 괴도의 무리가 나타났다. 앞선 괴인은 8척 장신으로 범의 수염과 같은 턱수염이 빽빽이 돋았는데 누런 수건을 쓰고 있었다.녀석은 2자루 개산활부를 들고 허리에는 쌍칼을 꽂고 있었다. 그 뒤에는
가후는 소년의 시체를 치우게 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자기 방으로 가서 누웠다. 평상심을 만들어 잠을 자려하나 잠이 들지 않았다. 가황후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날이 밝아 새소리가 요란할 때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짧은 잠을 자는 가운데 꿈을 꾸었다.무수한 독사가 가후의 몸을 칭칭 감고 돌며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가후가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애를 썼으나 말문이 막혀 말을 생산하지 못했다. 가위에 눌린 탓이었다. 가황후는 이와 같은 병 아닌 병으로 한동안 시달리다가 잠을 깨어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이로부터 가황후는 병을 얻어 자
그는 귀가 울고 목마름이 심하여 이를 참고 사방에 곁눈질을 하다가 그만 귀부인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다. 가후는 소년이 응대가 시원치 않았으나 소년의 미색이 뛰어난지라 이를 묵인하고 침을 한번 삼키고는 흥분된 마음을 누르며 다시 묻기를“네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소년은 이번에는 가후의 음성을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대답하기를“열 여섯살입니다.”“참 좋은 나이로구나.”“모르옵니다. 좋은 것을...”“그래, 알게 해주마. 이리 가까이 와서 내 다리를 주물러 다오.”이 말에 소년은 비로소 가후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가후는 백옥
대신들이 의견을 주고받는데 우매한 혜제는 멀건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너무 잔말이 많은가 보오. 태부께서 알아서 처리하시오.”그리 한 마디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준은 몇몇 대신들의 직언을 묵살하고 자기 소신대로 이 일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게 후한 녹위를 내렸다. 하여서 심복인 장소를 태위에 봉하여 금군을 관장케 하고 충직한 장화와 화교를 태자의 보익을 맡아 동궁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동생 양제와 심복 하소 왕융 배계도 동궁에 나가 태자 휼을 가르치게 했다. 양준은 또 가황후의 마음이
혜제는 무제의 장례를 마치고 외조부 양준을 태부로 봉하고 정사를 섭정케 하였다. 그리고 태자비 가씨를 황후로 삼고 아들 휼을 태자로 책봉하고 재인사씨(才人謝氏)를 태자비로 삼았다.이때 여남왕 양은 사마중달과 복씨부인 사이의 소생으로 허창에 진수하여 예주의 군마를 총독하고 있었다. 그는 무제의 신임이 있어 생전에 자기에게 정사를 맡길 뜻을 흘린 바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정권을 잡을 날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무제가 붕어하자 양준이 하루 밤 사이에 정사를 독점하므로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양준은 일찍이 여남왕 양
한실 말엽 이래 군웅이 할거하여 분열이 심화되어 국가가 국가다운 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진은 AD 265년에 즉위한 진제 사마염의 집권 시기를 제외하고, 황권은 계속 약화되었다. 황권의 약화는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야심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살인·약탈·방화가 빈번했다. 결국 국가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이런 국면을 조성한 원인은 진제 사마염이 3가지 저급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첫번 제후왕을 분봉한 것이다. 사마염은 황제에 즉위할 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경력이나 견식에 일천했다. 그는 자신의 조
유연은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을 쌓는 일을 착수했다. 10여 일이 지나자 유림천에는 큼직한 영채가 법도에 맞게 세워졌다.유연은 군사를 안배하여 영채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땅을 일구어 공명과 강유가 시도하여 재미를 보았던 둔병법을 실시하였다.둔병이란 군사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일이다. 군사란 일단 유사시에는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하지만 평상시에는 피나는 훈련을 통하여 전쟁에 대비해야 하며 훈련의 일환으로 농사일에도 힘쓰는 일이다.이런 정신으로 제갈공명은 평상시에 훈련과 농사일을 병행하여 군량미
애써 자신의 근심된 것들을 감추고 의연해 보이려고 했다. 그러자 장수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종알대어 응답하기를“장군 염려 마십시오. 죽도록 싸워 반드시 승리의 영광을 안겨 드리겠습니다.”“잘 이해했다. 이제 우리는 전진만이 살길이다. 가라!”등애는 2천군마를 거느리고 도보로 행진하여 별빛이 빛나는 밤에 강유성을 무찌르러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촉국을 정복했던 것이다.이야기가 등애 때문에 길어졌다. 유연이 깊은 결의를 담아 기도를 마치자 원탁이 무릎을 꾼 채로 경건하게 말하기를“진실로 제갈승상은 사람 중에서도 특출
진한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하는 유연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달픈 마음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여기서 잠깐 ’이화초흥(二火初興)하면 유인월차(有人越此)하고 이사쟁충(二士爭衝)하면 불구자사(不久自死)란 말을 마천루 봉우리 밑 바위에 새겨놓아 후일 제갈무후를 회자하는 후학들이 있게 한 이야기를 해보자.촉국이 등애에게 망할 때 등애는 길을 내고 산을 뚫어 마천령을 넘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절벽을 내려간 장병들이 땀을 씻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의갑과 무기를 정돈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앞을 바라보니 길섶에 비석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어허~ 참으로 놀랍습니다. 장군은 귀신이 감당 못 할 큰 힘을 가졌소이다. 이런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잡다니 하늘의 위력이 아니고서 가당키나 한 일이겠소. 내가 듣기로 옛날 전국시대에 제나라 사람 맹분이라는 역사가 황소의 뿔을 잡아 뽑았다 했습니다만 그 힘도 전장군의 힘만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원탁이 그리 말하자 마난 노수 올합대도 만년을 향하여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보내고 이어서 마난이 다시 말하기를“오늘은 경사스런 날이니 소장이 유연 공을 비롯한 여러분을 모시고 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오니 박주라 나무라지 마시고
호랑이가 나타나자 먼저 말이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들도 머리끝이 오싹했다. 오줌을 싸며 벌벌 떠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모양을 직시한 마난은 군사들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징을 치게 하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다시 한 번 더 포효하면서 원탁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달았다.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자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오금이 저려서 호랑이를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저리 큰 짐승을 대항해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이런 상대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하필이면 원탁을 골라 나아가
마난과 노수도 만년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전만년을 황충에 비교하여 칭찬했다. 과연 황충은 어떤 위인이기에 그랬을까? 잠시 촉국에서 황충이 활약했던 모습을 살펴보자.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형주 점령에 이어 계양군과 무릉군을 쳐서 빼앗고, 다시 관우를 앞세워 장사군을 공략하고 있었다. 정벌군의 선봉 관우와 장사군의 용장 황충의 싸움은 용호상박의 격한 싸움이었다. 두 장수는 백 합이 넘게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다음날, 두 장수가 다시 불꽃을 튀기며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황충의 말이 발을 헛디뎌서 그만 황충이 말에서
원탁은 즉시 마난의 군중에 가서 철태궁을 가져오게 하였다. 철태궁은 비단주머니에 잘 갈무리 되어 있었다.여기서 잠시 우리나라가 가졌던 활의 종류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고대부터 전해온 활도 그 종류가 다양하나 조선시대의 활은 대체로 7가지로 나누어 사용했다. 전투용·수렵용·의식용·연습용으로 대별하여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다.① 정량궁(正兩弓):속칭 큰활이라 하며 길이는 5척 5촌이며 그 모양이 각궁과 유사하나 크고 두꺼워 힘이 센 활이다. 무과(武科) 응시자는 모두 이 활로 시험하였으니 무인(武人)으로서 이 활을 쏘지 못하는 자는
유영은 장창의 깃발을 떼고 몸을 날려 말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을 몰고 교련장 중앙에 자리 잡더니 창을 세 번 돌리고 나서 마난의 활과 화살을 빌려 계속 6개의 화살을 쏘아 표적을 모두 맞추었다.이 모습을 바라보든 강병들의 박수소리가 교련장을 떠나갈 듯 울렸다. 유영이 묘기를 마치자 뒤를 이어 백근과 요전이 나와서 각기 재주를 선보였다. 모든 강병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교련장이 이와 같이 후끈 달아오르자 유연도 좌시할 수 없어 가만히 일어나 말하기를“세분 대인께서 거두어 주신 은혜에 보답코자 하오니 나에게 석궁을 빌려주십시오.
학원탁은 마난과 노수 두 장수와 그런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유연 일행이 학원탁이 베푸는 무술시합장에 나왔다. 노수가 유연 일행을 한바탕 훑어보고는 먼저 입을 열어 말하기를“우리는 오랫동안 변방에 살았기에 함부로 궁도를 휘두를 뿐인데 오늘은 이곳에서 중원의 법도 있는 묘기를 구경하고자 합니다. 전 장군께서 간직하고 계신 신기를 보여 주시는데 인색하지 마십시오.”“소장을 그리 칭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망국한을 품고 사는 소장이 부끄럽기 짝이 없으나 대왕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영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행여 보잘
이에 유연이 원탁의 말에 쾌히 대답하자 원탁은 올합대에게 명하여 마난과 노수 두 장수를 청해 오라 명하기를“장군은 사람을 속히 마·노 두 분 장군에게 보내어 내일 영평강에서 궁술을 겨루어 보자고 전하라.”올합대는 명에 따라 군사를 마난과 노수 장군에게 보냈다. 뜻밖에 전령이 오자 마난과 노수 두 장군은 무슨 연고인지 전령에게 묻기를“회동할 날짜가 아닌데 어째서 부른단 말이냐? 행여 무슨 까닭인지 아느냐?”“어제 중원에서 몇 사람이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명궁이라 하자 대왕께서 그 사람과 궁술을 겨루어 보게 할 것으로 압니다.”마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