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 삼전패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본존)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발원문 등 복장유물 4점 포함)과 부여 무량사 삼전패(三殿牌)가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5일 이 둘을 비롯한 문화재 17점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예고를 했다.석가여래좌상(본존), 아미타여래좌상(우), 약사여래좌상(좌)으로 구성된
보물 제1845호로 지정된 부여 사택지적비. 문화재청 제공 부여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가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에서 보물 제1845호로 승격·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2일 부여 사택지적비를 포함해 모두 8점의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예고’를 한 지 두
부여 사택지적비(夫餘 砂宅智積碑·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가 보물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20일 사택지적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사택지적비와 같은 수준의 문화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미술·서예사 측면에서 가치를 재평가한 결과 이 같이 결정하게 됐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이 비는 백제인
▲ 1992년 8월 17일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된 이지함의 묘, 보령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하던 사업이 잘 안 될 때, 사랑하는 사람과의 궁합이 궁금할 때, 미래가 걱정될 때 많은 이들은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거나 간단하게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참고한다.본보 23면에도 토정비결을 바탕
▲ 1872년 김처선(金處善)의 고향으로 알려진 전의(全義) 지도. 터는 현재 관아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세종 출신 '충절의 아이콘' 목숨 건 마지막 충언 다시 돌아온 '왕의 남자' 세종~연산군 여러 왕들 시종 총애 받으며 충신 역할 '톡톡' "어찌 폭군의 길 걸으려 합니까" 연산군에게 직언, 비운의 죽
대전 동구 가양동에 있는 박팽년의 유허. 사육신의 이름으로… 희대의 천재들 글자혁명 주도 계유정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 단종 복위 계획 중 세조에 발각 살려준다는 말에도 그저 "나리" 끝내 전하라 부르지 않다가 죽음 1417년 현 대전 동구 출생 박팽년 그 이듬해 홍성서 태어난 성삼문 어린나이 집현전학사로 능력 발휘 세종 총애
▲ 김종서 장군 묘(金宗瑞 將軍 墓)는 세종시 장군면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12년 12월 31일 대한민국 세종특별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됐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공주 출신 용장 북방 개척 대업 왕좌쟁탈전 첫 번째 희생자 3세기나 걸린 복관과 명예회복 압록강·두만강 유역 4군 6진 개척 국토 확장·대륙 진출 교두보 마련 단종
맹사성(왼쪽) 영정과 세종 9년의 왕지. 맹사성이 우의정에 봉해졌음을 알려주는 기록.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청렴의 길을 걷다 거짓없는 역사를 위해… 1360년 공민왕 9년 아산 출생 최고 반열 정승에 올랐음에도 남루한 옷차림 검소함 생활화 청백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역사 왜곡 논란 예방하기 위해 세종의 태종실록 열람 왕명 거부 사료수집&mid
예산 대흥면에 설치된 형제의 동상. 충남역사문화연구원제공 볏가리로 확인한 우애 행동하는 선행 귀감 효행까지 깊었던 형제 서로에게 볏단 몰래 쌓아주었던 두 형제의 지극한 우애지심 감동 이들 일화 초등학교 교과서 실려 자라나는 아이들에 우애 본보기 부모님 생전엔 정성껏 모시고 돌아가신 뒤엔 무덤 지키기도 1970년대 중반, 한 라면 회사의 광고가 전파를 탔다.
수 차례 왜구 토벌하며 입신양명예순 넘은 나이에 전장 누비기도명에 맞서 요동정벌 명령했지만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숨 거둬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고려의 적지 않은 충신들은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했고 수많은 인재들은 고려에 대한 충성을 택하며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문신들 중에선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그의 동문들이 고려를 그리
고려말 국운 스러져감에 한탄사나이 우정보다 신념에 충실우국충정으로 우왕 곁을 지켜조선 개국과 함께 유배길 올라벗 이성계의 구애도 끝내 거절고려 망국 5년 후 의문의 죽음 이색영정.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죽어서 이름 뿐 아니라 희대의 작품을 남긴다.‘백설이 잦아진 골에
정인경 영정. 서산정씨대종회 제공 타향에서 온 이주민들은 해당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사회는 학연과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있는 폐쇄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맥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능력이 출중한 인간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적되기도 한다.‘삼국지(三國志)’에서 형주(荊州&midd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태조(太祖) 대부터 불교를 장려한 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했다.특히 불교는 신라 말 이후 교종과 선종이 함께 발전하며 고려의 불교적 종교 기반도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불교는 곧 국가’라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rsqu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는 전쟁으로 기록됐다. 다른 부족과의 전쟁, 다른 국가와의 전쟁 등 다양한 전쟁이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비극적인 모습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의식이 바뀌고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이다.특히 인간들의 의식을 바꾸는 봉기운동은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전쟁들과는
한반도는 지금까지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외세에 의해 침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왔다.특히 동아시아의 맹주라 칭해지던 중국세력과 바다건너 약탈을 일삼는 왜구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는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에 들어서도 크고 작은 전쟁을 원치 않게 치러야 했다.한반도가 많은 외세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국
한(漢)나라 황제의 황숙이지만 돗자리나 짜던 유비(劉備)가 촉(蜀)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인품에 끌린 난세의 영웅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조운(趙雲)은 물론이고 유비와 서로 창끝을 겨누었던 마초(馬超)까지 그들은 모두 유비의 인품을 보고 주종관계를 허락했다. 유비의 수하 중 많은 인재들이 있었지만
좋은 꽃에 나비가 모이듯이 좋은 선생에게는 제자가 끊이지 않는다.역대 성인(聖人)들은 많은 수의 제자를 보살폈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공자와 석가모니, 예수는 적제는 10여 명, 많게는 수십여 명까지의 제자를 두기도 했다.공자와 석가모니, 예수는 뛰어난 인품 등으로 그들의 제자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들을 흠모하고 가
유교사상이 강한 동아시아, 특히 국내에서는 가정윤리의 핵심을 ‘효(孝)’에 두었고 효는 전통사회의 확고한 가정윤리로서 자리잡았다.‘충(忠)’도 효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지만 중요도 면에서 효를 앞서지 못한다.충의 시작은 효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은 효에서 출발한다고 본다.‘효자가문에 충신
촉(蜀)나라의 강유(姜維)는 자신의 주군인 유선(劉禪)이 위(魏)나라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촉나라 재건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결국 눈을 감았다. 후세는 이런 강유를 가리켜 충절의 인물로 표현하곤 한다.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국(亡國)이 되고 중국으로 끌려간 의자왕(義慈王)이 결국 붕어함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장
대개 왕의 이름은 사후 지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왕의 이름만 봐도 그 왕에 대해 어느 정도 평가를 내릴 수 있다.이런 점을 비춰볼 때 의자왕(義慈王)은 동정이 갈 수 밖에 없다.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의롭고(義) 자비가 충만했지만(慈) 후세들이 기억하는 의자왕은 ‘한 국가를 파멸로 이끈 어리석은 군주’,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