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삼 장군 고택. 논산시 제공 이삼(李森)의 고택은 논산시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돼 있다. 174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英祖)에게서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이삼의 재실은 전체적으로 ‘ㄷ’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이어져 집 전체가 형태를 이루는 전통적인 재실 건물
▲ 이삼 영정.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체력이나 힘이 좋으면 머리가 비상하지 않거나, 반대로 머리가 비상하면 체력이나 힘이 달리는 것이 우리들의 선입견이고 대부분 들어맞는 사실이다.간혹 체력과 힘도 좋고 머리까지 비상한 인물이 있으나 아주 드물다. 특히 이런 인물들은 주위의 시기와 견제로 인해 높은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어렵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일제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문화재를 수탈했는데도 한 세기가 넘도록 반환은 고사하고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 당시 국내 최고 부자였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그 많은 사재를 바쳐 중요 문화재를 되찾았다. 또 그는 해방 전후와 6·25전쟁 중에도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보관해
지금은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고위 공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한국에서 여성이 사회 생활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더욱이 여성이 학업에 뜻을 둔다는 것은 더욱 금기시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심했는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rsq
문희숙 박사 김호연재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지만, 그의 뛰어난 문장 능력과 진정성이 묻어난 삶 때문에 김호연재 알리기 위한 운동은 그가 눈을 감은 대전을 중심으로 꾸준히 펼쳐지고 있다.대전 동춘당공원에서는 오는 10월까지 김호연재를 주제로 한 ‘2014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총 6회에 걸쳐
김구의 독립운동+이승만의 건국투쟁+박정희의 산업개발 등을 긍정적 측면에서 융통합한 독립영웅으로 오스만제국을 멸망시키고 서구식 민주공화정을 수립해 추앙받는 터키의 국부가 있다.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 1881~1938)는 이슬람의 혁명가+제국의 수호자+신생국의 건설자로 활약했다.무스타파는 1
이간의 고택 한원진 초상 이간의 문집 판각 한원진 간찰 두 명의 승려가 휘날리는 깃발에 대해 다투고 있다. 한 승려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인다”고 하자 다른 한 승려는 “깃발이 바람을 흔들고 있다”고 반론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고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지나가던 다른 승려가 와서 “당신들의
▲ 이간의 고택.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이간, 한원진과 관련된 사당은 모두 충남에 위치해 있다.이간의 고향인 아산 송악면 외암리 외암마을은 선조들의 충효정신과 전통의 향기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마을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마을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면 소나무 숲과 아담한 정자가 있으며 마을에는 10여 채의 전통 기와집과 20여 채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1919)+한국애국단장(1928)+임시정부 주석(1940) 등을 지낸 민족의 큰별이다. 종교적으로 유교(1884)+동학(1893)+불교(1898)+기독교(1903)로 개종한 그는 파란만장한 융통합적 민족자존의 지도자였다.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 논산에 위치한 윤증의 고택으로 윤증의 자를 따 명재고택이라 불린다. 한옥의 교과서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졌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한국 유학사에 있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는 양대 산맥이다. 이 가운데 기호학파는 율곡(栗谷)학파가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율곡 이이(李珥) 이후 기호유학의 흐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은 우
윤증의 초상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명재 윤증(明齋 尹拯) 초상은 윤증이 83세가 되던 1711년 여름에 후손과 제자들의 주선으로 도화서 화원 변량(卞良)에 의해 처음 그려졌다.사실 윤증은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제자들에게도 초상화 그리는 것을 금했다. 때문에 제자들은 할 수 없이 몰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때마침 윤증이 은거하고
전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의 수장이자 바티칸시티의 국가원수인 프란치스코 교황(Papa Francesco, 1936~)이 오는 14일부터 4박5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종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서유럽의 총대주교+이탈리아의 수석대주교+로마관구 대주교+수도 대주교+로마의 주교다.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했다. 특히 임금은 만화
송시열이 건립한 충남유형문화재 제76호 팔괘정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서에 이름이 한 번 나온다면 그 인생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3000번 이상 거론됐고 전국 4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됐다면 어떤 의미로든 대단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rs
대관령 너머 강원도 동해안의 수많은 경승지 중 손꼽히는 관동팔경(關東八景)에는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의 시문과 그림이 전해오고 있다. 관동팔경은 조선 선조 때 강원도관찰사였던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관동 지방과 금강산 일대를 돌아본 뒤 읊은 관동별곡(關東別曲)이 가장 유명한데, 정철이 꼽은 관동팔경은 통천 총석정, 고성
평생 한복을 입고 ‘씨알사상’을 주창하면서 폭력 거부+권위 저항+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자유+민주+평화를 실천한 민족의 지도자 함석헌(咸錫憲, 1901~89)은 무교회주의와 퀘이커교를 신봉한 기독교인, 비폭력적 투쟁을 앞세운 독립투사, 성경과 동서양의 고전을 융통합한 종교사상가, 씨알을 위해 독재와 싸운 민주투사, 역사를 가르친 민족혼의
남이흥의 묘.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충남 서해안 지역인 서산과 당진에는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과 관련된 유적 등을 찾아볼 수 있다.당진 대호지면 도이리는 의령남씨(宜寧南氏) 충장공파의 400년 터전이다.도이리가 남이흥 장군가의 터전이 된 것은 남이흥의 증조인 참판공 남세건(南世健)이 1536년에 충청관찰사로 관내를 순시하다가 이곳을 자손들이 대
육상에서 김시민 장군,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 덕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종결시킨 조선이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매우 컸다. 전 국토가 피폐해졌고 사망자는 가히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국민들은 당장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한반도에 일어난 것이다. 몇 차례 위기가 있긴 했지만 임진왜란을 통
극동의 뿌리가 유교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극동 삼국, 그 중 특히 한반도는 유교 사상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다. 과거 선조들이 주창하던 충과 효 등은 이 사실을 방증해주고 있고 인간관계에서 선배를 대우하고 존대하는 우리나라의 ‘예(禮)’를 보면 유교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사실 예라는 것은 유교가 발달
김장생(金長生)은 예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조선 오현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후 예학연구 전문집단인 학파의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당시 김장생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의 적전(嫡傳)으로 기호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 퇴계(退溪)와 율곡의 활약에 힘입어 주자성리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됐고, 나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