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은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도로를 기준하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은 1857년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1848~1916)가 도시의 성벽을 허물고 넓은 대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시가지는 도보로 둘러볼 수 있지만, 링 바깥은 트램이나 지하철을 타야 한다.빈 시내에서 남서쪽에 쉔브룬 궁전(Schloss Schonbrunn)은 당시 유럽의 초강대국 프랑스와 필적하는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Leopold I: 1658~1705)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16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국력이 커지면서 인스브루크의 호프부르크 궁을 모방하여 100여 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빈의 호프부르크 궁을 완성하여 1440년 수도로 옮겨왔다. 이후 빈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이자 예술, 과학, 음악, 요리의 중심지가 되었다. 1차 대전 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호프부르크 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으로 증개축되어 지금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했다.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프랑크족인 작센 왕조의 오토 1세에게 ‘신성 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Vienna)는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독일왕 루돌프 1세(Rudolf Ⅰ: 1273~1291)가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Ottokar II)를 치러 가던 중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승리를 챙긴 후,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에게 주었다. 1440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이자, 1805년부터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는 영어식 표기이고, 오스트리아인들은 빈(Wien)이라고 말한다. 지리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산이 많은 국가 중 하나여서 높은 산만큼 계곡도 깊다.
인스브루크에서 가장 번화한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가 끝나고, 좁은 헤르초크 프리드리히 거리부터 구시가지(Altstadt)다.구시가지는 6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발자취가 곳곳에 많이 남아있어서 인스브루크를 ‘알프스의 장미’라고도 한다. 구시가지 거리의 양쪽은 라우펜이라고 불리는 천장이 낮은 고딕식 아케이드 보도인데, 중세도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미장원, 옷 가게, 술집․ 여관이나 호텔 같은 점포마다 입구에 파마머리나 옷․ 술잔 등을 특징 있게 철제 간판이 보도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문맹자가 많았던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Innsbruck)는 알프스산맥 동부 해발 574m의 고지대에 있는 산악도시다. 인스브루크는 지리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서쪽에 있어서 남-북으로 이탈리아·독일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오히려 수도 비엔나(Wine)와는 거리가 멀어서 국제적인 교통의 중심지다. 인스브루크는 이탈리아에서 브레너 고개를 넘어 독일로 이어지고, 또 스위스에서 서부 유럽으로 연결되는 주요 무역로의 교차점으로서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지로 발달했다.인스브루크란 지명은 협곡 사이를 흐르는 인강(Inn)에 놓인 다리가 교역로 역할을 하여 ‘인강(Inn)
동쪽으로 헝가리, 서쪽으로 스위스,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체코, 남서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영어 오스트리아(Austria)는 게르만어로 ‘동쪽의 나라’라는 뜻인 ‘외스트라이히(Österreich)’이다.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으로서 유럽을 호령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1800년 초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이었다.그러나,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영토 분할로 수국이 되고,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서유럽국가 중 프랑스와 독일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
밀라노의 중심인 두오모 성당과 스카라 극장 광장까지는 차 없는 거리처럼 이어지는 가로공원인데, 이곳에 186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뉘엘 2세(Vittorio Emanuele II : 1820~1878)의 청동 기마상이 밀라노 대성당을 향하여 바라보고 서 있다. 가로공원의 끄트머리인 스카라 극장 광장에는 르네상스 3대 화가 중 하나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1519)의 동상이 있다. 밀라노 대성당에서 에마뉘엘 2세 청동 기마상을 바라로 때 오른쪽에는 주세페 멘고니의 설계로 1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자, 프랑스·오스트리아·스위스 등 북유럽으로 통하는 도로·철도·통신망을 갖춘 도시 밀라노(Milano)는 현재 롬바르디아주(Lombards)의 주도(州都)로서 140만 명이 살고 있는 상공업이 발달한 국제도시다.이탈리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데, 나폴리·소렌토 등 로마의 남부는 주로 농업지대이고, 피렌체·밀라노·피사 등 로마의 북부 도시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밀라노는 지리적으로 알프스산맥의 남쪽 사면과 접하고, 반원형의 산지에 싸인 북쪽은 건조지역인데, 포강 가까이 평야지대에
페리를 타고 베네치아 부두에 내리면 비좁은 섬에서도 제법 넓은 광장 같은 도로가 있다. 부두에서 베네치아 부두에서 수 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까지 가려면 몇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산마르코 광장까지 가는 도로는 사실상 베네치아의 메인 스트리트다.이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인종 전시장 같은데, 이들을 상대로 수많은 노점상과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형형색색의 가면과 모자다. 가면은 산마르코 광장을 에워싼 베네치아 주재 각국 대사관에서 매일 밤 무도회를 개최하면서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처음 해외여행에 나섰던 30년 전만 해도 프랑스와 불란서가 다른 나라이고, 플로렌스와 피렌체가 다른 도시이고, 베니스와 베네치아도 그런 줄 알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플로렌스가 피렌체의 영어식 지명이고, 베니스도 베네치아의 영어식 지명이란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쩌면 해방 이후 우리는 그만큼 미국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이탈리아에서 중세 유적이 가장 많은 도시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Venezia)인데, 그중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약 4㎞ 떨어진 아
라벤나(Ravenna)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고도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서고트족, 서고트족을 멸망시킨 동고트족, 동고트족을 멸망시킨 동로마 등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지배하면서 이룩한 초기 기독교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다. 라벤나에서 가장 유명한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은 6세기 중반 동로마 유스티아누스 황제 (Justinianus Ⅰ: 482∼565)가 라벤나를 탈환한 뒤 이미 동고트 왕이 짓고 있던 로마 건축양식에 모자이크 등 비잔틴 기법을 절충한 성당이다.
라벤나(Ravenna)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고도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서고트족, 서고트족을 멸망시킨 동고트족, 동고트족을 멸망시킨 동로마 등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지배하면서 이룩한 초기 기독교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다. 라벤나는 십자군 전쟁 이후 약 400년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라벤나를 다스렸던 베네치아 궁과 2개의 원기둥이 있는 포폴로 광장을 지나면 라벤나의 수호성인인 산타폴리나레와 산비탈레 성당 (Basilica di San Vitale)이 잇따라 있다.산비탈레 성당 가까이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하여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질러 동쪽 아드리아해로 빠지는 652㎞의 포강(Po)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포강 하구에 있는 도시 라벤나(Ravenna)는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주도(州都)로서 주민은 약 15만 명 정도이지만,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고도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서고트족, 서고트족을 멸망시킨 동고트족, 동고트족을 멸망시킨 동로마 등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지배하면서 이룩한 초기 기독교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다.라벤나는 나폴리~로마~피렌체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에서 북유
외국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황당무계한 관광지가 참 많다. 벨기에의 ‘오줌싸개 어린이 동상’,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상’과 함께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로렐라이 언덕의 ‘마녀 상’을 ‘세계 3대 사기’라고도 말하지만,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우리 한반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도, 이것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디어 부족이라고 생각한다.베로나(Verona)는 12세기 초부터 자유도시가 되었는데,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가 심각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약 185㎞ 떨어진 베로나(Verona)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아디제강(Adige) 유역에 있는 고대도시다. BC 89년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의 식민지가 된 베로나는 400년경 갈리아 지역의 게르만족 일파인 켈트족(Celts)이 훈족(Huns)에게 밀려서 로마 제국의 영토인 베로나로 밀려오면서 빼앗겼다. 겔트족의 일부는 바다 건너 지금의 잉글랜드로 갔다. 베로나란 켈트족 언어로 ‘울타리 나무’라는 뜻인데, 베로나 일대는 지금도 사이프러스 나무가 많다. 베로나는 1405년 베네치아에 점령되어 17
알프스산맥이 이탈리아 북쪽에서 동서로 뻗으면서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와 국경을 형성하는데, 알프스산맥의 카디보나 고개에서 지중해의 시칠리아섬까지 1192㎞에 펼쳐진 아펜니노산맥은 한반도의 태백산맥처럼 이탈리아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다. 그중 피렌체 남쪽 해발 200~800m의 키안티 산맥에 있는 산악도시 키안티(Chianti)는 BC 800년경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정착하면서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토스카나주 한가운데인 피렌체(Firenze)와 시에나(Siena) 사이의 높고 낮은 언덕들이 겹겹이 펼쳐진 구릉 지대에서 시에나, 아레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도시 피렌체는 이탈리아반도 북부의 중심인 토스카나주(Tuscana)의 주도(州都)다. 토스카나라는 지명은 BC 800년경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Etruscus에서 Truscus로 축약되었다가 토스카나로 변했다고 한다. 알프스 북쪽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는 피렌체는 순례자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음식업이 발달하여 1152년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남쪽 지역인 피렌체를 비롯하여 도시 키안티(Chianti), 시에나(Siena)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지파인 기벨린(
피렌체 시내를 흐르는 아르노강 위에 놓인 베키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피티 궁전(Palazzo Pitti)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는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가는 길이다. 피티 궁전 방향으로는 먼저 넓은 피티 광장이 있고, 그 앞에 피렌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호화로운 붉은색 석조 건물 피티 궁전이 있다.(자세히는 2023. 6.23. 베키오다리 참조)피티 궁전은 원래 1450년 피렌체의 상인이자 코시모 1세의 친구였던 루카 피티(Luca Pitti)가 베키오 궁전을 부러워하며, 그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다가 중단된 건물이었다
동서고금의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도시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생활용수를 공급해주는 강을 끼고 있다. 피렌체 시내를 흐르는 아르노강(Arno River)에는 10개의 다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베키오 다리(Vecchio Bridge)다. 베키오란 ‘가장 오래된’이란 의미다.아르노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는 6세기경 로마가 피렌체를 처음 개척한 이후부터 나무다리를 설치해서 사람이 통행하도록 했지만, 홍수로 다리가 자주 유실되었다. 그러자 1350년 두오모 성당과 종탑을 설계했던 지오토의 제자 타데오 가디가 튼튼한 대리
교통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의약품 판매와 은행업으로 많은 부를 쌓은 메디치가의 조상은 조반니 메디치이고,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도시로 만든 인물은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Cosimo de' Medici: 1389~1464)다.당시 유럽에서는 피렌체를 ‘장사꾼의 도시’라고 멸시했다. 1434년 피렌체의 시뇨리아가 된 코시모는 1453년 이스탄불의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튀르크에 패망하자, 동로마의 문화와 예술, 예술가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적극 후원하여 피렌체의 명성을 높였다. 또, 건축·예술·복지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