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크마르 폰 라임스(Hinkmar von Reims: 810~882)를 인용한 마이어 교수에 따르면, 이 시대에는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기면서 곰들의 재주 놀이를 군중들에게 보여주는 이도 있었는가 하면, 곰의 머리털은 약용과 부적으로 팔았다고. 1542년 쾰른의 연대기에는 순례객들이 길거리에서 곰에게 춤을 추게 하고선 돈을 벌기도 했단다. 중세의 직업군 중 하나가 '개를 타격하는 직업인'이었다. 이들의 의무는 미리 계약된 돈을 받으면서 길거리에 흩어져 돌아 다니는 개를 잡아서 죽이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같은 경우는
중세의 명화들을 자세히 보면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관심이 일어나 독일체류 때 몇 권의 흥미 있는 자료들을 모았는데, 그 중에는 중세의 개와 사냥에 관한 논문도 있다. 근데 동물 사랑과 학대는 이 시대에도 있는 일이다.하지만 '동물재판'까지 한다는 사실은 좀 놀랍고, 좀 믿기지도 않기에 미리 참고자료들을 밝힌다. 프랑크푸르트의 독문학 교수였던 헬무트 브락커르트 박사, 함부르크 대학의 스포츠학 교수인 카타리나 피에트쯔, 중세사학자인 로베르트 데로르트, 중세/근세사 교수인 프랑크 마이어 박사, 구약성서신학자인 실비아 슈
또 하나 첨부된 사료에는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이 여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기록이다. 왕이 이 도시 부근에 잠시 머물렀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들려준 것이 틀림없다고 역사가들은 강조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이렇게 전설과 실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얘기가 여성운동가로 잘 알려진 유명한 시몬느 베이유와, 중세의 저술가이자 여성 철학자인 크리스티네 데 피산(1364~1429) 등등과 함께 ‘특출한 여인들-여성주의와 가족’이라는 저서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실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의학적으로 쌍둥이를 낳을 확률을 예를 들어보면 ‘6쌍둥이는 3만 2768밀리아르덴(Milliarden: 10억) 출생 중에 한 명, 7쌍둥이는 26만 2144밀리아르덴(Miliarden: 10억) 중에 한 명’ 이 나온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계산이 잘 안 되기에 필자는 10억이라는 숫자만을 나열했다. 확률로 따져도 무지 어렵다는 뜻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이 외에도 현대의학의 근거를 조목조목 대면서 불가능하다는 의학적인 의견 제시를 했다.이런 통계와 견해들은 전문적인 의학 부분이니 일단 전문가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바르
이런 사회적인 문제와 가톨릭의 교리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산원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낙태와 피임법을 널리 알리자, 교회의 눈에는 이것들이 가시로 보였다 보니, 아주 엄한 비판을 가했고, 금지는 물론이요 속죄와 벌을 내렸다. 이런 연장이 중세후기에 이르러 마녀사냥의 근원이 되었다.중세는 출산의 위험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산을 한 용감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독일 바덴뷔텐베르크 주의 뵈닉히하임 출신으로, 이름이 바르바라 스트라츠만(1448~1503)이다. 처녀 때 이름이 ‘바르바라 쉬모쳐’로 결혼 후
다음은 약초피임법을 보자. 때로는 마법을 넣은 음료나 연고를 사용하는 레시피도 있었고, 약초를 보면 알라우나뿌리, 양배추 잎, 양배추 씨앗을 삼나무기름으로 섞어서 작고 동그랗게 만들어 자궁에 넣고, 반면에 남자는 성기에다가 백연(Bleiweiß)과 히말라야 삼나무과 나무의 기름을 바르라는 방편도 있었다.그 외에도 여자는 1.5리터의 바실리쿰을 태운 물을 마셔야만 한다. 아주 번잡하고 허식적으로 보이는 이 방편들은 꼭 성공을 약속하는 보증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는 것처럼 당시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중세유럽에는 산부인과병원 같은 것이 당연히 따로 없었다. 아니 오늘날 같은 의료혜택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주로 약초를 다루는 조산원들의 도움으로 집에서 출산을 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산모와 신생아가 죽음으로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보니, 출산을 앞둔 산모들의 불안감이 커짐은 당연했다. 산모들은 성당을 찾아 순산 기원을 하면서 종교에 매달렸다. 그러함에도 이런 두려움을 다 떨칠 수가 없자 이런 출산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부적까지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심지어 그 유명한 중세의 힐데가드 빙
이 일로 평화롭던 이 가정은 깨져 버렸고 법정 일로 번졌다. 너무 신기하지 않는가? 마리아가 자기 '부인' 요한나를 3년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니! 후에 요한나의 진술도 요상했다.자기 '남편'은 너무나 철저하게 가장으로 잘 살았노라고! 남편은 파이프 담배를 멋있게 피웠고, 자주 낚시도 갔다. 심지어 재봉틀로 옷까지 만들곤 했었다고 진술했다. 하여간 부인 요한나는 남편이 남장을 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그들은 3년간 자매처럼 살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3년 동안 그녀의 '남편&
오늘날은 원하면 性 전환까지 할 수 있는 시대다 보니 어쩜 남장 여인들 얘기가 별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비춰보면 상당히 별스러운 얘기에 속한다. 그 잣대는 성서 모세 5경 22, 5(=신명기 22, 5) 여자는 남자 옷을 입어선 안 된다. 남자는 여자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었다. 이 근거로 여자가 남장을 한다는 것은 철저한 금지사항에 속했다.이들은 물론 동성연애자들은 아니었고, 단지 남장으로 변장했다는 것이다. 유럽史 안에 이런 남장여인들이 대략 1500~1800년 사이에 자주 등장했다고
그는 시간이 갈수록 인간적으로 점점 더 피폐해져 갔다. 또한 잘 씻지를 않았다 보니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퀴퀴한 냄새로 진동했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침대는 담배연기와 알코올, 심지어 배설물까지 함께했다 보니 더 불쾌한 냄새로 진동했다. 아주 신선한 장미를 방에 두고선 이런 냄새를 덮어 보려 시도했으나, 퀴퀴한 냄새와 장미향이 어우러져 더 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를 풍겼다. 발톱과 손톱도 자라는 그대로 두었을 정도로 그가 외모를 단정하게 가꾼다는 것은 아예 관심 밖의 일이었고 현실에서 점점 더 사라져가는 일상이 되었다.그렇다 보니 그
기안과 사적 공무 관계를 맺은 자가 자그마치 370명 정도였다는데, 이들 중에는 몇몇의 여인들도 소속돼 있었다. 이들은 대공의 기분상태에 따라 퇴폐적인 놀이에 참여했는데, 이들의 선발 조건은 참 다양하다고 앞에서도 약간 밝혔다.일단 아름다워야 하고, 젊어야 하고, 성적인 매력을 풍겨야 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대공 기안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자세가 된 자들이어야만 했다. 당시의 이 370명 중에는 진짜 호머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단 먹고 살기 위해서나, 학생들로서 돈을 벌 목적으로 이런 그룹에 들
이제 마지막 희망봉은 막내 자식인 기안이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이런 메디치家의 마지막 등불인 막내아들 기안은 점점 더 방탕한 생활로 이어갔다. 1728년 피렌체를 방문했던 몽테뉴가 남긴 기안에 관한 표현을 보면, 기안은 이성은 지닌 듯 했으나 너무 게으르고 심지어 늘 술에 찌들어 있었다고. 그렇지만 기안은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근데 불행이 다가왔다. 이런 저런 갖은 방편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후손을 얻어 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 코시모는 1723년 죽고 말았다.52살의 기안이 이젠 대공인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 받았다 하
마르쿠스 마이어 교수의 언급을 보면, 후에 파울루스 3세가 아직 교황으로 등극하기 전의 이름인 알렉산드로 파르네제(+1549)가 추기경이었을 때의 얘기다. 파르네제 가문도 메디치처럼 당시에 떵떵거리는 가문에 속한다.이 가문에도 후손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이 추기경은 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만들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두 아들을 이 대가 끊길 뻔한 이 파르네제 가문의 합법적인 자손들로 인정한다고 공인했다. 만약에 당시에 교황이 나서서 이런 공인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식들은 결코 합법적인 자식이 될 수가
그는 말의 냄새를 싫어했고, 그녀와의 잠자리도 별로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즐겨 찾은 대상은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 중에는 굴리아노 다미(Guliano Dami)가 있었는데, 낮은 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기안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안의 연인이었다가, 후에는 그의 뚜쟁이가 되었다. 왜 뚜쟁이인지는 나중의 얘기에 나온다. 1698년 기안은 부인과 함께 함께 살 이유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자,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구실을 붙여서 파리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파리에 있었던 그의 엄마는 이 아들을 아주 냉정하게 맞이했다
#. 딸인 안나 마리아에게 기대를 걸다이젠 메디치가에 문제가 생겼다. 그토록 기대했던 대물림 자손을 얻지도 못하고 첫 아들까지 죽어버렸으니! 그러자 이제 코시모는 아들이 아니고 두 번째인 딸 안나 마리아에게서 후손의 기대를 걸었다.딸을 시집 보내기 위해서 스페인, 포르투갈 등등의 왕실도 고려했으나 결과적으로 제후인 요한 빌헬름(Johann Willelm von Pfalz-Neuburg)과 혼인을 시키는데, 이 신랑은 초혼도 아닌 상처한 남자다. 비록 상처를 했다손 치더라도 3명이나 되는 그의 누이들은 포르투갈의 황제비와 왕비이니 그
#. 대공 코시모 3세 첫 번째 자식 페르디난도 이야기페르디난도(1663~1713)의 아버지는 1675년 그의 엄마와 헤어졌다. 그의 엄마가 파리로 돌아갔다 보니 페르디난도는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산다. 그는 말을 특출하게 잘 탔고, 음악에 대한 재능도 상당했다. 그는 바이에런 공화국의 공주인 비올란테(Violante)와 결혼하지만, 어찌 되었는지 그 역시 자기 부인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서는 아예 베네치아로 떠나버린다.페르디난도는 이 곳에서 한 음악가를 사귀게 된 것을 대단히 기뻐했는데, 사실은 그 전에 그의 교육 담당자가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와 유대인들의 결혼을 금했는가 하면, 당시에 그리스도 신자들만이 갈 수 있는 창녀촌에 유대인들이 들락거릴 경우 큰 벌금을 물게 했고, 한 그리스도교 창녀가 유대인을 상대로 성을 팔았다가 이 여성은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에서 허리와 엉덩이 사이의 요부를 드러낸 채 채찍질을 당했다는 얘기도 남아있다. 거기다 1683년 코시모 3세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여인들이 유대인 집 아이들 유모로 일하는 것조차 금지 시켰다.사실 당시는 이 코시모 대공만이 이렇게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억압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민초들의 손에, 왕
교황을 대동하는 혼인잔치였다 보니 호화찬란한 예식들이 거행되었다. 이런 여인들은 많은 지참금을 몸에 감고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갔으나, 처음엔 영 적응을 잘 못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장사로 돈을 번 신흥부자들의 딸들이었다보니, 때론 본인이 이런 전통왕실에 적응을 잘 못하고, 왕실인들은 이들을 무시했다는 재미있는 얘기들도 남아있다. 아무리 돈이 철철 넘치는 부자라 할지라도 전통왕실을 상대하기에는 조금은 힘겨운 부분들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듯이, 이렇게 떵떵거리
비비안 그린 교수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 그리스로마시대부터 근대까지 정신적인 광기가 있는 왕들을 테마로 강의를 하였는데, 이 테마들을 ‘권력과 광기’라는 책으로 발간했다.물론 광기라는 말은 ‘마음이 산란하여 날뛰는 증세’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국한하기보다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 우울증 증세까지 포함된 광범위한 의미다. 사실 왕관을 쓰고 나라를 다스린 이들이, 이런 일종의 정신병인 증세가 있다면 나라꼴이 참으로 말이 아닐 것이라는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다. 현대처럼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정신과 의사
아무튼 이 생리는 인간 삶의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제로 출발했지만, 다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진다.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생리를 문 입구에 발라두면 마녀를 물리치는 방편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화재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만약에 생리하는 여인이 밭에 들어가 이리저리 활보하게 되면, 이 밭의 해충을 막을 수 있게 된다고! 처녀의 생리를 무기에다가 대장질하면 싸움이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는 것!그 반대의 경우는, 만약에 생리하는 여인이 와인에 닿으면 와인이 신맛이 나고, 우유를 응고 시키고, 식물의 싹을 만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