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단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조선 사회의 결혼에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그림에도 목단이 중심에 있다. 부귀영화라는 것이 의식주만이 아니다. 의식주가 아무리 풍부해도 행복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아버지의 마음이, 엄마의 마음이 담긴 부귀영화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결코 물질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시들지 말라고 그림에 담아주었다. 사랑, 화목, 믿음, 신뢰를 바탕으로 행복해지길 바랐다. 목단 속에 이런 꽃말들이 살고 있는데 의식주만 있다고 보면 목단을 오해한 것이다.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며 부귀영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
인간의 품위를 지켜주는 기본이 되는 것이 의·식·주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차이가 없다. 그걸 알고 있는 인간들이 부적처럼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란 그림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 중에 욕망이기 때문이다.이 욕망을 채우려고만 할 때 인간은 불행해 진다. 모란 그림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면 부귀영화는 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걸 쌓고자 해서 행복했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마음을 모란이 알았다면 설령 그림에 피어 있다고 해도 시들 수밖에 없다.
늙은 엄마도 꽃을 탐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의 기억이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어떤 사랑에 닿는다. 그 사랑이 어디를 향하든 엄마에게 청춘의 어떤 시절이 있었다. 작품에서 꽃과 비유되는 청춘이 아름다운, 아니 행복한 미소를 얼굴에 밝혔다. 이런 시절을 인간의 삶에서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간다.아니 거쳐 가야한다. 그 시절의 사랑을 생각하면 나이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그런데 청춘의 나이, 꽃과 함께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나이, 그 나이의 사랑은 이 작품처럼 행복하다. 화병 곁에 놓여있는 사과가 청춘의 심장처럼 뛰고 있
일월오봉도에 무언가 담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담아야 할까. 백성들이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도 있다. 백성이 행복해야 임금도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다. 화병을 보면서 지도자의 품을 생각했다. 품이 넓고 깊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주권자의 요구이다. 주권자는 담는 사람이 아니고 담겨지는 사람이다. 지도자의 품은 그래서 넓고 깊어야 한다.화병에 형형색색 꽃들이 담겨져 있다. 인간이라면 꽃을 보고 누구나 질투심이 일어난다. 꽃과 관련된 비유를 보면 안다. 인간이 얼마나 꽃 같은 세월을 보내고 싶어 하는지. 꽃은 비유의
모든 생명은 꿈을 꾼다. 생명이기에 가능하다.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은 하나다. 자궁이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물이다, 태양이다. 이런 자양분이 갖춰져 있어야 생명이 자리를 잡는다. 이 작품에서 물이 보이고 태양이 보이고 그것을 연결해 주는 탯줄이 보인다. 자궁 안에서 생명이 편한 잠을 자고 있는 느낌이다.몽환의 문을 열어본다. 우리는 기억이 없지만 엄마의 자궁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그 때 꿈꾸었던 것은 무엇일까. 몸은 기억하고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는 힘들 때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명
단지 추위를 막기 위해서 동물의 가죽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작가라면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다. 열렬함을 얻기 위해, 따듯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피를 찾아 목숨을 걸었다고 상상한다.태어날 때 온 몸을 감싼 그 포근함, 그 뽀송뽀송함을 잊을 수 없어 동물의 털을 간절히 원했다고. 작품은 말한다. 이런 모습을 언제 어디서 느꼈는지. 그리고 다시 말하고 있다.왜 잃었는지, 잊고 사는지. 어릴 적 나도 이런 경험을 했다, 엄마한테. 엄마 품을 떠난 뒤 아내에게서 느낀 감정이다. 외로움도 알고 보면 우리 몸에 배어있는 본
인간의 역사에서 사과는 원죄의 상징이다. 사과를 먹지 않았으면 인간은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과를 먹을 수 있어서 이렇게 살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밝히기 위해 사과가 외출했다. 은빛 도시로.이 작품에서 사과가 없었으면 어떨까. 이런 표현으로 일갈하고 싶다. “사과를 먹지 않았다면 원죄를 안고 태어날 필요도 없지만 사과를 먹어서 인간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었다.” 사과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의 땅에 빛이다. 태양이다. 은빛 도시에 뜬 희망이다.박홍미 (1981
사람이 사는 이유를 하나의 단어로 모아본다면 행복이다. 행복을 찾아서 이곳저곳 날아다닌다. 행복을 찾지 못한 지친 날개는 늦가을 낙엽 아래 접는다. 낙엽의 시간을 돌아보면 봄날 꽃과 함께했다. 꽃과 함께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행복의 기억도 담고 있다는 뜻이다.꽃은 얼굴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꽃이 예쁘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할 때도 꽃으로 비유를 한다. 꽃은 사람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작품을 보면 꽃 속에 사람이 있다. 꽃 같다. 꽃 속에 있으니까. 아니다, 작품 안의 사람은 꽃을 넘어서 참 행복하다.
여행 중 여러 풍경을 만난다. 그 풍경은 추억의 옷을 입고 나와 동행한다. 작품 안에는 사물이 가득하다. 그런데 비좁은 공간이 비좁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하루의 끝자락에 대해 말하고 그냥 흘려보내도 좋을 이야기들이 아닐까.탁자에 술병이나 음식이 중심을 잡고 있지 않고 이야기가 놓여있다는 것이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한 줄기 빛이 식당과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포근함까지 느끼게 한다.
무언가 말하고 싶다. 그런데 마음을 다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려면 작은 단초라도 제공해야 한다. 어떤 것(복선)을 숨겨놓아야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여기까진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의 모습이다.미술 역시 표현을 하는 도구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 작품의 유일한 단초는 제목이다. 제목으로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순수의 단초’ 인간이라면 품고 있는 마음이다. 당신이 잃어버린 아니 잊고 지낸 순
굽이 높다. 이런 슈즈를 신고 있는 분을 보면 불안하다. 내가 남성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구두에 남성이 뿌리를 내렸다.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불안할 것이다. 다시 보니까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예쁘다. 남성과 슈즈는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잘 어울린다는 말보다 ‘한 몸이 됐다’고 말하고 싶다. ‘이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말은 박제된 사고다. 예술 세계에서는. 이지영 (1976년~) 작품명 : Ove
주목해야 할 부분은 눈이다. 우리 세대의 부자(父子)가 서로 얼굴 마주 보며 시선 마주치는 일이 평생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런데 작품 안의 눈은 전쟁터에서 만난 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살벌하다.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얼굴이 됐을까. 세대 간의 필연적인 시각차 때문일까. 사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남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성장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만나야 한다. 이덕영(1990년~)작품명 : 아버지와 아들작품크기 : 130.3x162.2cm재료 : Pen and p
얼굴이 낯설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섦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옷을 벗는다. 문제는 보는 순간 찾아드는 이미지를 어떻게 소화하느냐다.작가는 각자 다른 사물로 얼굴을 만들고 그 얼굴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낯설게 한다. 평면이 입체로 보이는 낯설음도 있다. 얼굴을 통해 심리변화를 읽어본다. 하나하나의 독립된 모양으로 하나의 심리를 만들어 갤러리들에게 작가가 하고자 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낯섦을 찾아보자. 작품을 통해 작가의 심리도 볼 수 있고 보고 있는 갤러리의 심리도 투영될 수 있다
꽃은 얼굴이 없는데 사람들은 예쁘다고 한다. 색이나 향기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 때문이다. 향기가 없는 꽃, 색이 없는 꽃을 상상해 본다. 향기가 없는 꽃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후각으로 느낄 수 없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화병 두 개에 자본의 꽃들이 만개했다. 차고 넘쳐 화병에 들어가지 못한 꽃들도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꽃은 꽃이 아니다. 향기도 색도 없는 꽃이 화병 속에 들어가 화려하게 피어있지만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었다.사람들은 피었다 지는 꽃보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조화(자본의 발명품)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경험이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인다. 경험치가 없을 때 당혹스럽다. 이런 감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자신만의 생각을 사물에 투영하는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은 사물을 규정하려는 생각을 벗는다. 실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시각이지만 규정하고 결론을 내려는 것은 마음이다.그 마음을 놓으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예술의 속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깨거나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김려향 작가의 작품 ‘stained stuff’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에서 감상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것은 엎질러진 우유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우유 때문이라면 다시 담을 수 없지만 닦을 수는 있다. 빈 주머니 털어서 우유 하나 샀는데 그 우유가 엎어졌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유가 상징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 골방보다 좁은 곳에서 아니 겨우 책상 하나 놓을 수 있는 공간에 우리의 미래(청년)들이 산다고 말하면 높으신 분들에겐 어떻게 들릴까.젊은 친구가 우유가 엎질러졌다고 이럴 수는 없다. 우유 한 병에 얼굴색이 변하고 표정이 변한다면 이 인물의 현실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빨간 카펫을
‘투명하다’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너무나 선명하니까 숨길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는 마음도 있을까. 아니면 순결하니까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이 사족(蛇足)의 의미일까. 작품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났다. 색, 나뭇잎, 나비가 하나의 옷을 입었다. 심지어 하트 모양도 하나의 색에 살고 있다. 어떤 시인의 투명한 핏줄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투명하니까 슬프다. 투명하니까 아프다고 말을 못했다.최 작가의 작품에는 투명함을 확대해 놓은 부분이 있다. 적확하게 말하면 돋보기로 확대한 것이 아니라 색으로 했다. 작품에서 한 부분을 흰
사물은 점에서 이미지를 만든다.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고 직선과 곡선이 모이면 평면이 만들어진다. 평면이 모여 입체(형태)가 나온다. 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지를 자신이 원하는 것(감정)으로 탄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점들을 모아 이미지를 만드는 작가의 마음을 읽으면 들키고 싶지 않는 감정들이 엿보인다.감정이라는 것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점으로 찍을 수 있지만 그 점이 감정을 일으키는 점이라면 함부로 찍을 수 없다. 감정의 점을 잡아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작가의 역할 중의 하나이다. 한수희 작가의 작품은 감
에어컨은 보이지 않고 실외기만 가득하다. 이런 곳에 혼자서 철계단에 앉아있다. 위로 받고 싶은데 내부에서 품어져 나오는 열기만 나를 감싸고돈다. 밖의 온도는 이미 끓는점을 넘어섰는지 모른다. 온도보다 더 견디기 힘든 현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아픔과 함께 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위로받고 싶은 주인공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물이 형형색색 옷을 입고 바라보고 있다. 작품에서 갤러리들은 보이지만 주인공만 볼 수 없는 구조다. 다름 아닌 오행의 정령인 ‘기린’인데 말이다. 기린은 외치고 있다. “나를 봐
공간이라는 말은 채울 수 없다는 뜻이다. 비어 있는 곳에 채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과 다를 바 없다. 시간으로 공간을 메울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인간의 시간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끝임 없이 이런 일을 반복하다 죽는다. 혹여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내가 발견했다면 그것은 공간이 아니다. 우주의 기원에서 볼 때 공간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이나 행성이 사라지더라도 그 공간은 그대로 있다.몸에서 공간을 얻기 위해 아니 공간을 넓히기 위해 수도자들은 한 생을 건다. 물질의 무용론을 깨우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스터웁쓰’라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