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일보] “인생은 서러움 그 자체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 그런데 그 서러움을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 같아.”그저 노년배우의 예능 독백에 뭔가 인생이 느껴졌다. 윤여정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1947년 개성 출생, 대학 중퇴, 배우, 결혼, 이민, 이혼, 홀로 두 아이 키우기까지 대강 찾아봐도 쉽지 않은 삶이었다.“배우들이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궁할 때야.”돈 벌기 위해 단역도, 보조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미국에서는 슈퍼 매대에서 캐셔로도 일했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제가 60살이 넘어서부터는 사치하
[금강일보] 대전에는 골령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하죠. 무려 2m 폭으로 100m가 넘는 구덩이가 산내 야산 초입에 6개나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 학살로 6700명 이상이 배추 포기 쌓듯 포개져서 돌아가셨습니다.그러나 나는 살며 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분명 우리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텐데 어쩌다 흘린 적도 없었습니다. 대전은 일제강점기에 급하게 생긴 도시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타 도시에 비해 사이즈가 크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전차도 없
[금강일보] 입향조가 어느 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무를 심었다. 세월은 흘러 자식이 태어나고 사람이 모여들어 그곳은 마을이 됐다. 나무는 어느덧 자라 하늘을 가리고 마을의 수호신이 됐다. 나무가 거대할수록 이곳에 사람이 사람을 지키며 잘 지내왔다는 증거가 돼 줬다. 어디라고 사람사는 곳에 말이 없겠는가? 그러나 마을에서는 잘못을 가르쳐 선함을 다독이며 무리없이 이어온 것이고 그 덕에 수백 년이 되었으리라. 때문에 마을 앞 나무는 자부심이 되고 정체성이 됐던 것이다.최근 원도심을 오가면서 옛 충남도청 부속건물이 보수되는 것을 지켜
[금강일보] 40년도 넘었을 법한 대전 동구 대동 언덕 한켠에 언젠가는 차고였던 자리는 카페가 됐습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벌써 4번째 가게를 오픈한 사장님입니다. 대전에서는 낙후된 구도심이 대동입니다. 15년 전 그곳에서 갈 곳 없고 할일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나게 강당에서 놀았던 것이 카페 사소한의 시작이었습니다.그렇게 시작된 토요일 놀이학교는 이제 초등에서 고등을 넘어 어른이 됐습니다. 학교 강당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던 날 대전외고 학생들이 바자회를 열어서 만들어준 300만
[금강일보] 평생 일하는 엄마는 아이에게 항상 미안했습니다. 지금도 전화를 걸면 ”밥 먹었냐”고 묻습니다. 숙제를 했는지, 공부를 했는지 묻지 않고 아이에게 밥을 먹었는지 묻는 것은 챙겨주지 못한 끼니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미의 눈빛을 보고 자란다는데 우리 아이는 그래서 그랬는지 키도 작습니다. 자는 아이 얼굴을 보면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쁘게 살아, 내 아이 자라는 모습도 다 놓치고 살았나 싶습니다.“엄마,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요.”올 것이 왔습니다. 나는 정말 아니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공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는 아프라시아브 궁전이 있었다. 600년대에 존재한 실크로드의 거점도시 ‘소그디아’의 궁전이었다.고대 도시 발굴 중에 노출된 진흙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각각 11m나 되는 네 벽에는 상한 부분도 있으나 충분히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벽에는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신들이 서 있었다. 그곳에 새 깃털 꽂은 모자(조우관)를 쓰고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맞잡은 두 고구려 남자가 환두대도를 차고 서 있다. 러시아 연구자가 먼저 알아보고 알려줬을 만큼 천상 고구려 사람
사람을 만나지 않을 관광, 비대면 관광 홍수 속에 대전은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대청호 둘레길을 찾아갑니다. 내륙에서 바다를 만난 것처럼 어찌나 거대하고, 속속들이 예쁘던지 한참을 놀랐던 대청호 둘레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자료를 보다가 ‘북에 고향을 둬도 통일되면 가면 그만, 우리네 실향민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고향에 못 가보는구나…’라는 인터뷰를 봅니다.원래는 산이고 곡이었을 대청호 바닥엔 분명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우린 잊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대청댐이 완공되고 마지막 공사를 앞둔 그날 수
[금강일보] 신탄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지역 마을활동가들이 열심히 준비한 신탄진걷기행사를 못하게 됐는데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없겠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은 없고 상황은 급했습니다. 일단 만나보니 평균 연령 60대에 깜짝 놀랐고 모두 다른 말씀을, 그것도 동시에 하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졌습니다.신기하게도 미팅 시간은 오전 8시입니다. 저희 집에서 신탄진은 지구 끝입니다. 팀 이름은 '마술사'입니다. 그러나 초새벽에 나가서 기다려도 여섯 분밖에 없으시다는데 완전체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방
대전 근대 건축물에 홀리듯 빠져들어 자료를 모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심 속에 놓여있는 근대 건축물의 특성상 사진이 예쁘게 나오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찍으면 전체가, 건너편에서 찍으면 차들이 지나는 통에 사진 한 장 건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사진 자료를 샅샅이 찾게 되는데 그러다가 지도 한 장을 만나게 됩니다.도청에서 대전역을 지나 소제동에 이르는 지도는 원도심 전부를 담고 전지 사이즈에 수채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거리의 상점과 점포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지도는 예쁘게 전달할 때 선택하는 ‘약식지도’이고
[금강일보] 사유담은 4년 전 시작됐습니다. 한남대학교 사학과 전공자들이 주축이 돼 없는 길을 열어 문화예술의 가능성을 열어보자 했습니다. 주 사업 분야는 답사와 문화강좌, 행사, 칼럼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돈이 될 만한 모델은 아니었습니다. 문화콘텐츠는 하나를 생산하고 그것을 재판매하면서 얻는 것이 이익이 됩니다. 이를테면 음반, 영화, 도서 등입니다. 하루에 고작 하나의 활동을 할 수 있으니 큰 돈보다는 유지하고 가능성을 보면서 일을 확장해야했습니다.답사는 한국에서 1년 단위로 8곳, 해외답사는 유럽과 중국을 무대로 자체 기획해
아펜젤러는 의사였고 아름다우며 지성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제 갓 결혼하고는 그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기도했다. 그렇게 서럽고 외로운 자를 도우라는 주님의 뜻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왔다.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초가에서 교회 터를 잡았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너무나 가난했다.이 가난을 끊어 주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선교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가르쳤다. 때문에 정동교회는 성전이라기보다 학교에 가까웠다.서울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남쪽으로 전도를 떠나기로 했다. 모두가 말렸지만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는 그때나 지금
피카소가 얼마나 천재냐고 묻는다면 딱 두 개만 기억하면 된다. 1944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한 공산주의자다. 빨갱이라면 노이로제에 걸린 한국에서 빨갱이를 이기고 그 이름이 화가를 뜻하는 일상용어가 됐다. 전쟁에 반대하면서 그린 게르니카의 한국 버전을 아는가?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신천리에서의 학살을 담았다. 한국정부가 좋아할 수가 없는 유명한 늙은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누르고 한국에서는 어쩌면 외국인 중 가장 유명하다.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미술학도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새 그림에 다
뜬금맞게도 그 추운 날 나는 파리 폐르라쉐즈 공동묘지에 있었다. 파리 그 화려한 도시에 도착해서 왜 무덤으로 들어갔을까?나는 쇼팽을 만나러 갔다. 쇼팽이랑 진한 인연이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렇게 쇼팽이 좋았다. 그런데 무덤은 우리나라 동산 위에 한 두개있는 형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어나간 파리사람들이 착착 쌓여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돼있었다. 찾다 찾다 너무나 추워서 포기하고 찻집에 앉아서 인생을 한탄하고 있을 즈음이었다.한 프랑스 청년이 “한국에서 왔느냐”며 반갑다고 했다. 외국에서 친절한 사람은 진짜
화가는 신이 났다. 이제 몇 점만 더 그리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가게 된다.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가보지 못한 고향이었다. 고운 하늘과 맑은 햇살을 생각하니 등이 간질간질했다. 이렇게 날을 새면 안 되는 나이였는데 마음이 끝없이 붓을 들게 했다. 그리고 또 그렸다. 새 색시가 신랑 처음보는 날, 분 찍어 바르듯 매만지고 매만졌다. 다 됐다. 잘 됐다.어려서부터 그림 재주를 타고난 아이는 여기저기 얻어 배웠다. 신동이란 소릴 들으며 배워나갔다. 선전에 나가 ‘청죽’으로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본 스승의
스페인 그라나다에는 이슬람궁전이 하나 있다. 알함브라다. 사막에 살던 사람들이 물과 나무가 신기해서 새 건물을 물과 나무의 궁전으로 만들었다. 도르르 도르르 흐르는 물줄기는 기타 선율을 타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됐다. 스페인은 긴 시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시점이 이슬람이 유럽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을 기념한 것이었다. 이가 갈리는 이슬람이 떠났어도 스페인은 이슬람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그라나다는 스페인 남부의 관광횃불이 됐다. 지킨다는 것은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 시
보통 학살은 점령군이 원주민에게 자행합니다. 그러나 6·25전쟁 시기에는 대한민국 군경이 국민을 죽였습니다. 자그마치 전국적으로 1000회가 넘고 30만 명이 죽어갔습니다.누가 죽었을까요? 보도연맹, 구속수감 중이던 좌익인사,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 인물들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보도연맹이란 이승만의 제1공화국에서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였습니다. 보도연맹이 뭔지도 모르고 보리쌀 준다고 이름 석 자 적고 간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이은주가 그
이케아는 길이 측정용 연필을 한국 점포에서 포기했고, 코스트코는 무한 양파 서비스를 접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나라의 수준은 경제지표로만 보지 않습니다. 국민의 수준을 봅니다. 한국은 한참 밑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아직도 멀었다고 여겼습니다.그러나 요즘 우리나라가 달라져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역사상 가장 투명하고 개방적입니다. 정부는 최선을 다하며 잘못된 것에 사과합니다. 나는 사과하는 정부에 당황스러웠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해서입니다.보통은 입도 뻥끗 안 하다가 운없게 들통나면 울며 겨자먹기로 ‘나만 그
십수 년 전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말했다. 갈 곳이 없다고 이 밤, 나를 위로할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젖먹이 아가를 집에 두고 나온 터라 멀리까지 가긴 어려웠다. 나는 차를 몰아 도시 불빛이 없는 곳으로 갔다. 어두운 농로를 따라 한참을 운전했지만 위로할 만한 곳을 찾기는커녕 둘이 힘을 합쳐 후진, 전진을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그날이 미안해 책임감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막힌 달빛 아래 나만의 호수를 찾아냈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위에 떠 있으면,나는 너를 생각한다.깊은 밤, 좁은
[금강일보] 바람 불어 낙엽만 떨어져도 대통령 탓인 나라에 살고있다. 오늘은 내멋대로 쓰련다. 해외에 자주 나서는 사람으로서 아는 척좀 하겠다.외국에 나가면 가장 먼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코리아’라고 답하면 ‘북이냐, 남이냐’고 곧바로 묻는다. 그럼 “당연히 남이지, 너는 북한사람 봤냐?”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김정은을 만나본 적은 있냐?”다. '못 가봤다는데 만나기는….’하여간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남보다 북에 많다.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 작은 나라에 관심없다. 그리고 나서는 아주 일부가 다시
이제는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우리 오빠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5살 지능에 간질과 베체트병, 그리고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체구가 크기로 유명한 집안에 오빠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습니다. 오빠는 하얀 얼굴에 짙은 쌍꺼풀을 가진 매우 호남형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장애는 오빠를 그냥두지 않았지요. 40이 가까워질 때까지 아픈 아들 학교를 따라다니며 졸업을 시키고 자격증을 따게 한 부모님은 억척스러울 만큼 아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정신질환이 왔을 때는 행동이 과격해졌고 덩치 큰 남자를 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