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마을 부용이와 아랫마을 사득이의 사랑은 ‘부사(芙沙)동’이 됐다. 언제적 사람들일까? 역사 짧다는 대전에서 솔솔 살아나는 부용이와 사득이의 이야기는 무려 백제시대로 올라간다.홀어머니를 모시던 부용이와 사득이는 매일같이 샘으로 물을 길으러 왔다.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려면 하루에도 수차례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걸음마다 흘러 넘치는 물동이를 짊어지고 다니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 젊은 남녀는 두 볼이 발그레졌다. 어여쁜 부용이와 씩씩한 사득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하지만 시절은 백제와 신
2005년 1월쯤으로 기억합니다. 아가를 낳은 지 두 달이 안 되었을 즈음이었는데 성심당에 불이 났다고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게 뭐라고 전화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듣고 충격에 빠진 내가 있습니다.안 그래도 춥고 아가는 어려서 맘이 불안한 겨울이었는데 성심당에 나쁜 소식이 들리니 눈물이 철철 났습니다. 내가 사장 딸도 아니고 어쩌면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빵도 잘 안 먹습니다. 얼마나 탔냐고 물으니 지금 시내가 난리났다고 했습니다.오후가 돼 겨우 불길이 잡혔다는데 옆 건물 외벽 전기합선으로 3층 공장부터 불이 붙어서 전소에
어린이날이면 성심당 단팥빵이 항상 커다란 선물봉지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때 빵은 성심당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호수돈여고에 다니고 나서는 성심당 빵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먹었습니다. 원도심을 떠난 후에는 아주 가끔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잊혀질 때쯤 성심당이 유명해졌습니다. 외지에 갈 때마다 대전에서 왔다고 하면 성심당 얘기를 상대가 먼저 꺼냈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그거 진짜 맛있다고 말합니다. 보통 익숙하면 그걸 뭘 먹겠다고 대전을 오냐고 반응하는 법이죠.그러나 성심당은 토박이에게도 맛좋은 곳입니다. 1·4후퇴때 메러디스비토
지난해는 ‘노잼’도시 대전방문의 해였습니다. 한 해동안 칼럼도 쓰고 라디오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대전이야기가 거의 바닥났습니다. 대전에 살 뿐 대전을 몰랐던 저에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대전열전을 적어야겠다 생각하고 어떤 사람을 적을까 생각도 하기 전 안여종 대표님이 떠올랐습니다.때는 12년 전. 한참 강의로 마이너리그를 평정할 즈음 한 지인이 소개해 줄 분이 있다고 저를 초대했습니다. 그곳에 세 사람이 영문도 모르고 마주 앉았습니다. 과학하는 김영주 대표님, 생태역사 하는 안 대표님, 그리고 오직역사 김기옥이 그렇게 만
대전 대흥동성당 종지기셨던 방지거(프란치;스코) 아저씨를 드디어 만나뵙게 됐습니다. 무려 23살부터 시작한 종지기 생활은 50년이 지난 73세에 마무리됐습니다. 올해로 100번째 생일이 되는 대흥동성당의 반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렇게2019년 9월을 끝으로 조용히 줄을 놓으셨습니다.어떤 사람이 같은 일을 50년 할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성당에 살고 계신다는 어르신은 약속에 맞춰 나오셨습니다. 머리가 하얗고 허리는 살짝 굽어 있었습니다. 조금은 어눌하지만 천천히 지난 50년을 순한 눈으로 설명해주시네요.“이제는 종을 기계가 쳐줘요.
대전 대덕구 중리동 나즈막한 언덕배기에 작은 집이 있습니다. 단청이 곱게 입혀있지만 담장안에는 한칸 건물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정려각입니다.고흥류씨 부인은 고려 공민왕 20년에 태어나서 지금의 대전 회덕에서 자란 진사 송극기와 결혼을 합니다. 벼슬을 하고있는 남편을 따라 개성에 살았는데 그만 진사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겨우 22살 되신 고흥류씨 부인은 재가하라는 친정의 권유를 뿌리치고 시댁이 있는 회덕으로 4살된 아이 손을 잡고 내려옵니다. 고흥류씨 부인은 지성으로 아이를 돌보고 시부모를 모셨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
가을 쌍청당을 보지 않고 어떻게 대전을 봤다고 할 수 있을까요? 11월에 둘째 주를 넘어가려면 나무는 아파 죽는다고 새빨갛게 달아오릅니다. 단풍입니다. 단풍이 절정이면 사람은 예쁘다고 난리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나무는 아프다는데 사람은 곱다고 합니다. 뭔가 잔인하지만 그래도 단풍이 곱게 물들면 저는 쌍청당에 들릅니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점에 부사정을 지낸 무관, 송유의 별당입니다. 대도시안에 이런 고택이 남아있는 이유는 여전히 은진송씨 가문이 이 고택을 지켜가며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송유는 23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처마는 동춘당이다. 마치 라미네이트를 한 것처럼 고르고 단정한 석가래는 차분하며 양쪽 처마에 다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로 곱게 날아간다. 결코 화려하다 말할 수 없는 자그마한 별당은 동춘당 송준길의 공간이었다.좁은 세 칸 집은 굴뚝이 없다. 그저 작은 구멍을 낮게 뚫어 연기가 낮은 곳에서 일찍 흩어지게 했다. 혹여 음식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 배곯는 사람들 맘 아플까 그리했다고 했다. 돌은 깎지 않고 자연돌을 그대로 사용해서 주춧돌을 삼았다. 담장은 낮아서 일꾼들도 어렵지 않게 올렸을 것이다. 가장
동춘당 송준길 선생님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해 거주했던 곳이다. 원래는 법동에 있었는데 지금의 자리인 송촌동으로 이사오게 된다. 잘 만든 한옥은 이렇게 이사도 다닐 수 있다. 비접착이기 때문이다. 기성복이 아닌 테일러의 맞춤같은 한옥은 고급주택이었다. 그러다보니 한옥은 내진설계를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진도 7을 이겨낼 수 있었다. 17세기 중엽에 만들
지난 2010년 또 다시 근대건축물 하나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번엔 지키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노력했다. 대부분이 개인소유인 근대건축물은 소유주 동의를 얻어야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다. 때문에 강제성을 가질 수가 없기에 심심찮게 사라지는 것이다.대전시 중구 대사동 99-7번지에 위치한 ‘대사동별당’은 1942년 공주갑부 김갑순의 별장으로 쓰였다. 김갑순은 도청 부지를 일제에 헌납하며 일급 친일 인사가 되어 있었다. 도청이 이사오고 나서 주변 땅값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고 김갑순은 천문학적인 부자가 되었다. 간간히 잊
당당히 등록문화재 169호였다는 사택은 1930년에 지어졌다고 했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사택이었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기록은 없어서 이 지역에 살던 일본인이 대전에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는 대전전기주식회사 사장이 살았던 건물’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대전사범부속학교 교장사택으로 쓰였단다. 집요하게 대전사범학교가 뭔가 찾아봤더니 충남고등학교였다. 대학교육없이 사범학교만 졸업하면 선생님이 되던 시절이 있었고 그 학교는 해방 후 충남고등학교가 됐다.부속학교라는 것은 그 학교에 딸려있는 초등학교를 말한다. 그래서 또 살펴
당당히 등록문화재 169호였다는 사택은 1930년에 지어졌다고했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사택이었다고한다. 사실 정확한 기록은 없어서 이지역에 살았던 일본인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는 대전전기주식회사 사장이 살았던 건물’이라고했다. 그러다가 대전사범부속학교 교장사택으로 쓰였단다. 집요하게 대전사범학교가 뭔가 찾아봤더니 충남고등학교였다. 대학교육없이 사범학교만 졸업하면 선생님이 되던 시절이 있었고 그 학교는 해방 후 충남고등학교가 되었다.부속학교라는것은 그 학교에 딸려있는 초등학교를 말한다. 그래서 또 살펴보니 중앙초등학교였
2000년 12월 건물이 하나 철거됐다. 한참 대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겨우 건물하나 부순다고 여기저기 말이 많았었다. ‘왜 저러나…새건물 지으면 되지. 왜 저렇게 흥분하나’ 했었는데 바로 그 건물이 오늘의 주인공이었다.근대의 건물도 가치롭다며 등록문화재가 지정되던 초입이었다. 연식으로는 어디 빠지지 않았던 한국은행의 건물주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옛 한국은행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지정이 돼서 이도저도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근대건축물은 그즈음 전국적으로 많이도 사라졌다. 한국은행 맞은편은 대전부
우남도서관은 1957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근대 건축물이다. 대전에서 6·25 때 임시수도 역할을 맡아준 것에 감사해서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당시 동전 100환의 주인공도 이승만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다.초등학교에서도 대통령 할아버지 80주년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상황이었으니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붙여 지은 건축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지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내려오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행했던 단순하지만
대전 원도심 대흥동을 걷다보면 뾰족하게 빨간 지붕을 가진 특이한 양옥집이 있었다. 걷다가 슬쩍 본 건물이 머릿속에 이렇게 강하게 남기는 어렵다. 직진 본능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특히 거리의 건물이 기억에 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걷다가도 머리에 새겨졌던 그 특이하던 양옥인 듯 양옥 아닌 양옥같은 집을 다시 본 건 신문에서였다.허물어졌단다. 아니 누가 그랬을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지만 이미 벌어져 버렸다. 1929년 서양건축양식에 일본식 다다미와 도코노마를 절묘하게 섞어서 지었고 철도청장이 살았을 것이라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1950년 7월 21일 북한의 공격은 무서웠다. UN군이 막기에도 버거운 총공격은 연일 계속됐다. 미 8군 24단장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은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일은 없어야한다며 마지막 철수 명령을 내렸다.지프차를 타고 철수를 하는 중에 딘 소장의 차는 길을 잘못 들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인민군으로 둘러싸여 도피로를 찾지 못하자 차를 버리고 산속을 걸어 지금의 진안, 무주지역에서 숨어지냈다.딘 소장이 대전 근교 어딘가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미카 3-129호는 미군특수부대 33명을 태우고
1937년 지어진 건물인 줄은 몰랐다. 어제 지은 것처럼 말끔했다. 대전 근대건축 어느 하나 아는 것이 없었던 나였다. 하지만 이 건물만큼은 몰랐다고 말하기도 뻘쭘하다. 본관은 사라져 버렸고 다행히 강당은 남아있다. 학교 건물은 네모 반듯한 것이 상식이었지만 대전여중 강당은 웨이브가 강렬하다. 대충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다. 대전이 만들어지고 최전성기를 달리던 1930년대에 상징처럼 지어진 학교였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물은 파란하늘을 보고 굽이치고 있다. 문화재청 이하 각 지식백과사전들은 초가집의 모양을 보는 듯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1919년 대전에 처음으로 천주교 대전교구가 생겼다. 급작스럽게 커진 도시에 성당이 필요하자 목동 언덕배기에 1921년에 지어졌다.‘어디쯤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도통 찾아가지 못하다가 내친 김에 나섰다. 개항기 성당은 언덕배기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 온사방에서 성당이 보이길 바랐던 이유였다. 명동성당도 공세리성당도 같은 이유로 언덕 위에 지어졌다.땅에 엎어지듯 낮은 집을 지었던 시절이었다. 황토고개 위에 저렇게도 하얀집은 얼마나 높고 예쁘게 보였을까?1932년 도청이 이전하고 대전의 인구가 은행동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성당
내가 알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지만 내가 살던 지역에 무지한 것만큼은 지식의 무한함 때문이라 둘러대기엔 부끄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숨은 보석들이 너무 귀해서 쓰다듬으며 적고 있다. 성심당에서 바라보면 길 건너 항상 있던 하얀색 건물이었다.대흥동성당은 1919년 처음 천주교가 대전에 들어와 목동에 있다 대전역 시대를 준비하며 1945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6·25를 지나며 그나마 있었던 건물이 폭격을 맞았다. 그 힘들던 시절 건축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임시 천막생활을 이어가다
일본인이 다니던 학교는 ‘소학교’라고 불리며 6년의 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는 ‘보통학교’라 했고 4년의 교육만을 시켰다. 과목은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을 만큼의 언어와 숫자교육이었다.일제강점기 일본인 주도로 만들어졌던 대전은 그 구분이 더욱 엄격했다. 중앙통에 있는 원동초등학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기에 코앞에 학교를 두고서도 조선인은 멀리에 있던 보통학교에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면 ‘국민학교’라해서 조선과 일본인학교를 통합시켰다.웬일인가 싶을 것이다. 이유는 잔인했다. 1930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