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생인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한 인물 중 하나다. 1950년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퇴하고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해 동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김수근은 각계 전문가가 부족했던 한국의 현실 속에서 건축학계 태동기를 이끌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김수근이 설계하고 1967년 준공된 (옛) 부여박물관(이하 부여박물관)은 독재정권을 위해 일한 그의 경력처럼 논란 많은 그의 삶이 축소돼있는 건축물이다. 부여박물관은 김수근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내재미와 형식미 추구의
강과 물은 생명의 상징이다. 금강을 중심으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부여 선사취락지 등 선사시대 유적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금강의 하천이 즐비한 부여는 선사인들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다.부여 산직리는 석성천과 웅평천이 빚은 넓은 들판이 있는 땅이다. 선사인들은 고대부터 기원전 약 800년에서 400년까지 거주하며 청동기시대의 취락, 묘제, 생업, 사회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을 다수 남겼다.부여 산직리 지석묘는 그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다. 지석묘는 ‘고인돌’의 한자식 명칭으로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육상교통 인프라가 부족했던 과거, 수로(水路)는 선조들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금강은 충청의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였고 공주는 그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말-일제강점기, 육상교통 비중이 높아졌지만 공주는 여전히 교통의 중심이었다.특히, 조선총독부는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곡물을 효율적으로 약탈하기 위해 육상교통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사업으로 인해 공주와 금강이 집중 조명됐다.1910년에 공산성 앞 나루터에 차가 통행 가능한 나무다리가 건설됐지만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근대적인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충남은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내포, 금강문화권으로 구분 된다. 내포문화권은 충남 서북부 즉, 서산, 태안, 홍성 등이 포함된 지역이다. 내포지역은 동쪽으로 가야산이 있어 서쪽 바다를 통한 해양교통이 발전해온 지역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자연스레 서해바다 건너 중국문화를 먼저 수용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급변하던 개화기,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건너온 천주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지역 또한 내포지역이었다. 실제 내포는 조선 3대 교구 중 하나였다. 내포지역에서 퍼진 천주교는 수도권일대로 전교됐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과 갈등을 빚기 시
조선 말, 전국의 탐관오리는 농민의 고혈을 쥐어짰고, 중앙정부는 외세의 침략을 막을 힘도 없었다. 무능한 정부 탓에 백성들의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1894년 남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라는 뜻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들을 막고자 파견된 관군은 오히려 동학농민군에 합류를 했고, 기세가 올라간 동학농민군은 충남으로 진입한다.그러나 정부는 일본의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려 했고 이러한 정부 태도에 분노한 백성들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일어나 관청을 점령하고 관료를 내쫓으며
매달 새로운 건물이 건설되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하는 행정수도 세종은 모든 것이 새로운 도시다. 모든 것이 새로움을 뽐내는 신도시에서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세종시와 금강을 지켜보고 있는 오래된 정자가 있다.독락정(獨樂亭), 홀로 즐기는 정자라는 뜻이다. 독락정은 조선 초기 지어진 정자로 제1번국도 대전방향 금남교 좌측 100m 지점에 있다. 그러나 세종과 대전을 자주 오가는 이들도 그 위치를 알지 못 하는 이가 대다수다. 외부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독특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락정을 찾기 위해서는 약간의 집중
끊이지 않는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전국 곳곳에 성(城)을 축조했다. 특히,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도성(都城), 지형지물을 활용한 산성(山城), 국경과 군사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한 행성(行城) 등 목적과 기능에 따른 다양한 종류의 성들을 전국 요지에 축조했다.읍성(邑城)은 주민과 국가 행정시설 등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행정 중심지에 설치한 방어시설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성종 때 전국 행정구역 330곳 중 읍성이 190곳이었다. 설치분포는 충청 20곳, 경상 45곳, 전라 39곳으로 조선 8도 중 삼남에 집중적으로
샤머니즘은 한민족·몽골족·카자흐족 등이 속한 북방유목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요소다. 자연을 숭배하고 소통하려하는 성질을 가진 샤머니즘은 시간이 흐르며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 중 하나인 굿은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춤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비는 행위다. 고대부터 이어진 굿은 수천 년의 역사동안 신과 인간이 만나 소통하는 방법이었다.한국 굿은 한민족 역사와 그 괘를 함께하는 친근하고 상징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다. 그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듯 한국 굿은 평생을 봐도 못 볼 정도로 지역·종류·목적마다 다른 형태의
대전시 중구에 위치한 명소 오월드를 지나는 산서로를 따라가면 국사책에서 봤던 ‘단재’와 같은 이름인 단재로를 만나게 된다. 이 단재로와 함께 흐르는 답적골천이 끝나는 지점에 이 호의 주인인 신채호 생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역사사학자이자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현재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유생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8살 때까지 이 곳에서 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충북 청원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단재로
고려·조선조정은 세금으로 걷는 곡식인 세곡(稅穀)를 배를 이용해 이동·저장했다. 특히 산간지역이 70%를 차지하는 한반도에서 드물게 평야가 있는 충남·전남·경남 즉 삼남의 세곡은 근 1000년간 이 땅을 유지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려·조선시대의 태안 앞바다는 항해기술이 부족했던 당시 험난하기로 전국 제일이었고, 특히, 안흥량은 조운선단이 가장 무서워했던 악로(惡路)였다. 그러나 세곡운송선인 조운선은 개성 혹은 한양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안 앞바다를 지나야만 했다.기록에 따르면 태종에서 세조 때까지 60년간 안흥량에서 일어
[2019년 신년운세] 2019년 기해년 띠별운세 보기[4월운세] 이달의 운세 (2019년 4월 띠별 운세)[주간운세] 이번주 나의 주간운세는? (4월 8일~4월 14일까지)[오늘의 운세] 4월 9일 [주간운세] 이번주 나의 주간운세와 금전운은? (4월 8일~4월 14일까지) 물병자리 (1.20~2.18)돌발 상황이 생겨,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또, 지나치게 조심하면 기회를 놓칠 수 있으니, 평소 계획을 철저히 세워두는 것이 좋아요.금전운: 고비는 지나갔습니다. 장사나 직장 문제 등에 빛이 보이기 시작하니 수입도
민족의 명산 계룡산 줄기가 휘감고 있는 한적한 충남 공주의 한 시골마을에서는 지금도 분청사기를 굽는 도공들의 바쁜 손놀림을 볼 수 있다. 바로 강진 청자, 광주 철화백자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도자기인 계룡산 분청사기의 고향 학봉리다.조선초기인 14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분청사기는 전국적으로 유행됐다. 특히,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생산된 계룡산 분청사기는 타 지역 분청사기와는 확연히 구분가는 독특한 문화재다.계룡산의 흙은 거칠고 높은 철분함량을 자랑하는 회흑색의 태토(胎土)다. 때문에 계룡산 분청사기는 고유한 색과 질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정부는 4월 11일 기념식을 개최한다.당초 1989년,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는 사료를 토대로 4월 13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로 정해 기념행사를 진행해 왔으나 학계 등의 요구로 올해부터 변경했다. 그러나 여전히 임시정부 수립일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정부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당초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조정했다. 정부는 지난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제정하고 1990년부터 국가보훈처 주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전에서도 지역 독립운동 발자취에 대한 재조명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대전시는 우선 대전 방문의 해와 연계해 지역과 관련된 독립운동 소재로 만든 대표 브랜드공연을 선보여 지역문화역사 이야기 홍보와 문화도시로의 입지강화를 위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다.1930년대를 배경으로 이봉창이 일본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뮤지컬 ‘임정, 마지막 밤’은 대전과 충청출신 독립운동가 신채호, 윤봉길 등을 재조명한다. 은밀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독립 운동가들과 당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상하이임시정부 임시헌장 10개 조항 중100년 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일제 강점기 투쟁을 이어오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임시정부가 선포한 임시헌장은 근대 민주공화제 헌법 내용을 담았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의 근
2019년 올해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해다.자주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3·1운동과 제국에서 민족으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100년을 맞은 뜻 깊은 해다.1919년 일제강점기 동안 가난 속 생존의 공포, 이념의 분열 안에서 이전투구를 벌였던 험준한 역사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됐다.3·1운동 이후 40일 만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4월 11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했다.지금의 대한민국 국호,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가 확립된 순간이다. ▶관련기사 3면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명하는 것처럼 예부터 우리의 도자기는 모두가 가지고 싶어 했던 명품 중의 상품이다. ‘고려하면 청자고 조선하면 백자요’라는 말이 있듯 도자기가 발명된 후 우리의 도공들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를 서로 자랑하듯 개발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자랑거리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선조들의 가마가 청자와 백자만을 잉태한 것만은 아니었다.고려 최고의 수출품은 고려인삼과 고려청자였고 최대의 수입국은 송나라였다. 그러나 경제대국 송나라가 몽골제국의 침입을 받자 수출량은 급격히 하락했다. 더욱이 청자는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며
태조실록 권3에는 1393년 1월 19일 ‘임금이 송경을 출발해 계룡산의 지세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 하니, 안종원, 김사형, 이지란, 남은 등이 따라갔다’라고 기록이 남아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이자 ‘왕씨’의 세력권인 송경(현재의 개성)을 하루빨리 떠기를 원해새나라 조선의 천도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권중화가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지도를 태조에게 바쳤고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기록대로 계룡산일대의 지세를 살피기 위해 친히 행차를 했다.1393년 2월 8일, 20일간의 대장정 끝에 계룡산에 도착한
한밭골 대전(大田), ‘큰 밭’이 있는 곳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대전은 명산의 땅이다. 계룡산, 식장산, 보문산, 장태산등 전국의 등산인들이 탐내는 명산들이 즐비해있다. 이 산들은 대전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다. 대전 둘레산길을 걷다보면 역사 속에서 이 땅을 수호했던 무수한 산성을 만나게 된다.▲계족산성국가사적 제35호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약 1.3km 지점에 있는 봉우리(해발431m)위에 축조됐다. 대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테미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가 1037m에 이른다.성의 축조 방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대전광역시는 수도권과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전은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고, 전쟁이 반복됐던 삼국시대 때 그 가치는 절정에 이르렀다.대전은 고구려의 남하노선, 신라의 한강 유역권 진출 교두보, 백제의 수도권 방어 지역과 같은 각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대외진출을 위한 공세적인 시선으로 대전을 바라봤다면 백제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수세적인 성격으로 대전을 보았다.그리하여 백제왕과 지도층은 대전에 수많은 산성을 만들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