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6위의 대도시 대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거세던 1905년 5월25일 회덕현과 진잠현의 경계인 대전천변 한산한 한밭마을에 경부선 철도의 대전역을 세우고, 1911년 7월 개통된 호남선 서대전역 사이를 흐르는 대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다. '넓은 들'이라는 순우리말 '한밭'이라고 불린 지역은 대전역과 대전천 사이 즉, 지금의 정동, 중동,
보문산 남서쪽 기슭인 사정동의 오월드(O-world)는 원래 원도심에서 가까운 보문산 중턱에 있던 대전동물원을 옮긴 뒤, 2002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개장한 것이다. 약58만 3000㎡(약18만평) 부지에 130종 600여 마리의 세계적 희귀동물을 가진 국내 세 번째 규모의 동물원으로 개장한 대전동물원은 2009년 100종 15만 그루의 나무와 8
대전시 중구청이 1997년11월 1일 보문산 남쪽 유등천변 약 6만 6000여 평의 부지에 개장한 뿌리공원은 전국에서 유일한 효(孝)를 주제로 한 테마공원이다. 중구청이 효 테마공원을 개장하면서 ‘뿌리공원’이란 명칭을 붙이게 된 배경은 아프리카에서 미 대륙에 노예로 팔려온 쿤타킨데의 7대손인 알렉스 헤일리(Alex Palmer Hale
대전 시내에서 금산 방면으로 17번 국도를 따라 충무체육관과 대전고등학교를 지난 부사동 네거리에서 약700미터쯤 가면, 도로 오른편에 조선 인조~현종 때 학자이던 봉소재 남분봉(鳳巢齎 南奮鵬: 1607~1674)이 세운 정자 봉소루(鳳巢樓; 대전시문화재자료 제35호)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보문산 등산로이기도 한 골목을 약70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단재 동상.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이후 우리 민족 말살정책으로서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식민정치를 자행했지만, 10년만인 1919년 고종의 인산을 맞아서 거족적인 반일운동을 전개한 항일운동은 민족의식을 거양한 계기가 되었다.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 1880~1936) 선생은 우리 세대에 낳은 민족지도자 중 1인이지만, 사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1980년대 정부대전청사와 대덕연구단지 조성으로 국내 제7위의 대도시로 성장한 대전은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더욱 발전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도심의 중심이 둔산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의 공동화 현상을 맞았다. 아직까지 원도심 거주 시민들의 공허함이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201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 울산, 포항, 광양, 일산, 성남, 분당, 세종 등 수많은 신도시가 건설되었지만, 대부분의 도시는 삼국시대 이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분지에 터를 잡아 형성된 고대도시이다.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거세지던 1905년 5월25일 회덕현과 진잠현의 중간을 흐르는 대전천변 한산한 농촌인 공주군 산내면 한밭마을에 경부선 철
1932년 공주읍에 있던 충남도청을 신도시 한밭 대전으로 옮기던 해에 개교한 동구 삼성동의 삼성초등학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붉은 벽돌로 지은 현대식 교사로서 대전 도심에 사는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명문이기도 했다. 학교 건물은 6·25전쟁 기간에는 피난정부를 추격하던 북한군이 일시 주둔하는 주둔지가 되었다가 유엔군의 반격 이후에는 유엔군이
여말선초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에서 호족이 3대에 걸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일인데, 우리 역사에서 가진 자가 보여주는 그런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유적이 대청호변에 남아있다.대전에서 옥천으로 통하는 4번국도 중 식장산 입구인
조선 4대 임금 세종의 둘째아들로서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임금이 된 수양대군을 반대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처형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이개(李豈), 유성원(柳誠源), 박팽년(朴彭年) 등 집현전학사 출신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하는데, 동구 가양2동 대전보건대학과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우암 사적공원 앞 주택가에 사육신
남간정사.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중 기호학파의 큰 줄기를 면면히 이어온 서인의 거두이자 노론의 지주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1607~1689)은 대전이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16대 인조부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등 4임금을 섬긴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것은 오직 그
식장산에서 바라본 대전시내. 계족산 주변의 산성은 사실 동구 쪽에 보다 조밀하게 세워져서 이현동산성·장동산성·성티산성·노고성·견두성·마산동산성·질현성·고봉산성(古鳳山城 : 추동 중추마을 뒷산)·능성·갈현성 등 30여 개에 이르는 산성을 중심으로
대전의 산 웅진시대의 백제는 신라의 주요 침투로인 금강과 미호천을 방어하기 위하여 두 강의 주변에 방어 목적의 산성을 많이 세웠다. 특히 23대 동성왕(479~ 501)은 신라 소지왕 때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하고 나제동맹을 맺었으나, 신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많은 성을 쌓아서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2012.
우리가 숨 쉬고 살고 있는 지구의 퇴적암 등 암석층에 보존되어 있는 지질시대 동식물의 잔유물이나 그 특징 또는 흔적을 화석(化石; fossi)이라고 하는데, 화석의 사전적 의미는 '땅을 파다'라는 뜻의 라틴어 fodere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화석은 동식물 그 자체의 유해인 체화석(體化石)과 나뭇잎이나 동물의 피부 또는 깃털 등의 특징, 발자국이나
2012년 7월 연기군은 세종특별자치시라는 광역지자체로 승격하였지만, 연말까지 세종시로 이전하는 중앙부처는 15곳 중 재정부, 국토해양부, 환경부, 농림수산식품부 등 4개 부처와 공정거래위원회 뿐이다. 금년 말 국무총리실이 이전하고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2030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라고 하고, 당분간 옛 연기군청이 세종시청 이름을 바꿔달고 있는 등 엉거주춤한
금년 7월부터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한 옛 연기군의 중심은 조치원읍이다. 일제의 영향이 한반도에 물밀 듯이 밀려오던 1901년 8월 서울과 부산간 이른바 경부선 철도부설을 시작하여 1905년 5월 개통되었으며, 1914년 3월 호남선 철도도 개통식을 하게 되었는데, 충청남도청 소재지인 공주와 충청북도청 소재지인 청주 사이인 조치원에 1905년 5월 조치원역을
연기군 금남면 감성리 마을 전경. 전 국민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1961년 5·16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산업화되면서 지금은 농업인구가 15%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반만년 동안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산천을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마구 파헤치고, 하룻밤 사이에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왔던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세대들은 먹고 사는 인간의 기본적 생존문제에 쫓겨서 삶의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해왔으나,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의식주 문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적 취향이나 성격을 즐기는 계층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국가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아닌 수집자의 취향이나 인생관을 반영하는 특정 분야
세종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연기현, 전의현, 금남면 중 특히 전의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마주하던 국경지대여서 많은 산성이 밀집해 있다. 백제는 전의현의 진산인 운주산 주변에 고산산성(高山山城)을 비롯하여 전의 향교 뒤의 토성(土城)→ 이성(離城)→ 작성(鵲城)→ 금이성(金伊城) 등 15개 이상의 산성을 세웠는데, 높이가 고
2012년 7월 1일 연기군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로 승격되면서 관내 읍·면·동의 명칭이 바뀌고, 일부는 공주시에서, 일부는 청원군에서 편입했다. 오랫동안 전의현(全義縣), 연기현(燕岐縣)과 금강 남쪽인 금남면(錦南面)이 각각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연기군(燕岐郡)으로 통합되었다가 100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