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홍주(洪州; 홍성)는 차령너머 충청도 최대도시이자 물산이 풍부한 내포지방의 중심도시로서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이기도 하다.지방자치시대를 맞아 홍성군에서는 고려 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을 비롯하여 조선 초 수양대군의 찬탈에 항거하며 불사이군으로 단종복위를 노리다가
대전 중구 은행선화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려는 다정다감한 이웃들이 많은 동네다. 충남도청 등 주요 기관이 위치해 행정, 문화, 교통의 요충지이며 은행동 젊음패션거리, 으능정이 문화거리, 선화동 전문음식특화거리 등 전문화된 특화거리가 있어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등이 많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
우리 역사에서 충청도 지방은 수많은 충신과 효자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차령산맥 너머 충청도 서해안 최대도시로서 조선시대 청주, 충주, 공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도시 중 하나였던 홍성 지방은 많은 역사유적과 함께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고을로 손꼽힌다(2011.05.03. 청풍명월의 고장 참조).홍성군에서는 홍성이 배출한 유명
오랫동안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충청도 서해안 어촌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서산 A, B지구 방조제 공사와 서해안고속도로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1979년 8월부터 현대건설이 홍성군과 태안반도 사이의 천수만(淺水灣)을 막는 거대한 간척공사는 착공한지 무려 15년만인 1995년 8월에 준공되었는데, 이 공사는
대전 대덕구 덕암동은 북쪽에 금강이 굽이져 흘러 충북 청원군 현도면의 양지리·노산리와 자연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솟은 해발고도 200m 산봉우리 너머로 신탄진동과 접하고 있다. 남쪽으론 회덕동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에 대전 제4산업단지가 들어선 목상동과 인접해 있다.예전의 덕암동은 니동·덕운리·덕암리·석봉
용봉산 전경. 2013년 1월 충청남도청 이전을 앞둔 ‘내포신도시’ 건설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작고 아담한 바위산인 용봉산(龍鳳山; 381m)이 있다.충청도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지맥으로서 가야산의 한 줄기인 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시대에는 차
대전 서구 도마동은 면적 3.4㎢, 올해 현재 4만 4065명이 거주하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도마 1동과 도마 2동이 나눠 관할한다.도마동은 동쪽으로 유등천을 경계로 중구 유천동, 서쪽으로 서구 도안동, 남쪽으로 복수동·정림동, 북쪽으로 변동과 접한다. 연자산과 도솔산을 따라 구릉과 평야지대로 이뤄져 있다.단독주택으로 형성된 재래도심 속에 일부
지난해 말 현재 면적 50.42㎢, 2만 17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대전 동구 산내동은 남쪽으로 충남 금산군 추부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 충북 옥천군 군서면 그리고 서쪽으로 대전 중구와 접하고 있다.산내동은 대전의 명산인 식장산과 만인산이 자리잡고 있어 온화하고, 기름진 옥토를 가진 마을이다. 전국 제일의 주산단지인 앵두와 당도가 높기로 이름난 산
먼 옛날 하늘나라에 있던 큰북이 땅으로 떨어져 생긴 둥글고 넓게 움푹 팬 천고낙지(天鼓落地)로서 외침을 막기에 더 없이 좋은 천하 명당으로 알려진 분지(盆地)인 홍성은 차령너머 충청도 서북쪽의 최대도시로서 동쪽으로 예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일명 대흥산)에서 북쪽으로 아미산(매봉재라고도 함)·용봉산(380m)·삼준산이 휘어 감고
면암 최익현 선생 영정.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에서도 충청도는 충신, 효자가 많이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다.특히 성리학이 붕괴된 한말과 일제강점기에도 충청도 선비들이 보여준 훌륭한 행동과 기개는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데, 한말 고고한 선비이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간 뒤 왜놈의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겠다며
대전지역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회덕 쌍청당’과 옛정이 묻어 있는 중리전통시장 등이 있어 살기 좋은 동네로 잘 알려진 중리동.중리동은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구성돼 주민들간 인심이 넉넉하다.도시개발로 인해 중리동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존중인 것뿐이다.◆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회덕 쌍청당 회덕
시 기념물 제27호 숭현서원전경. 대전 유성구 전민동만큼 도시팽창이 빠르게 이뤄진 곳도 드물다. 초기 5000여 명에 불과했던 동네 인구가 지난 1993년 대전엑스포 이후 급속히 늘어났다.현재는 8600여 세대에 2만 6000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으로 급성장했다.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위치한 전민동은 산·학·관·연이
장곡사 입구. 산마루가 높고 험해서 대치(大峙)라 하고, 계곡이 너무 깊어서 장곡리(長谷里)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는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천년고찰 장곡사(長谷寺)가 있다.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에 속한 장곡사는 여느 사찰의 암자 정도로 작지만, 국내 유일하게 경내에 대웅전이 2개이고, 2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대전 최초로 아파트 단지 조성서대전역 일대의 태평동(太平洞)에는 삼부아파트와 벽산아파트 등의 대규모 주거단지가 형성돼 있다.태평동은 대전 최초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으며, 거주세대의 87%가 아파트에서 생활할 정도로 공동주거지역이기도 하다.◆벌판에 자리 잡아 벌말태평동은 조선시대 공주목 유등천면(유포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에 자리했다 해서 벌말 또는 평리라
동쪽으로 공주시, 서쪽에 홍성군, 남쪽은 부여군, 북쪽으로 예산군과 인접한 청양군은 조선 태종 13년(1413) 칠갑산 동쪽의 정산현과 서쪽 청양현이 1895년 갑오개혁 후 각각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청양군으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청양군은 지리적으로 충청남도의 중심부에 해당하지만, 사방이 높은 칠갑산(七甲山; 561m) 줄기
금강하구둑에서 촬영한 철새들의 군무 2012년 새해가 밝았다. 12간지(干支)로 용(龍)의 해인 임진년(壬辰年)은 아직 멀어도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며, 양력과 음력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많은 요즘이다.아무튼, 요즘 전통적인 명승지나 문화유적이 아니더라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즐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상은 인간의 감성추구가 그만큼
◆목상동(木上洞)목상동은 지리적으로 대전 대덕구 최북단(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덕암동과 석봉동, 서쪽으로 문평동, 남쪽으로 신일동, 북쪽으로 금강과 충북 현도면이 인접해 있다.행정동인 목상동은 법정동인 목상동, 신일동, 문평동으로 이뤄져 있다.목상동은 남개(남해·목포)의 위쪽이 되므로 위남개·위남해·목상이
미개척의 땅, 사람보다 동물과 자연을 위한 곳 알래스카. 지구 이곳저곳 안 다녀본 곳 없이 다닌 여행자들도 최고의 여행지를 꼽으라 하면 꼭 알래스카를 순위 안에 넣곤 한다. 신성한 자연 앞에 인간이 한 없이 작아지는 곳, 만년설과 빙하가 맞이하는 신비로운 땅으로 가보자. 알래스카를 찾는 여행자들은 항공편을 이용해 앵커리지로 입국하거나 미국이나 캐나다 서부에
비래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동구 비룡동과 추동, 남쪽은 동구 가양동, 서쪽은 송촌동, 북쪽은 동구 효평동에 인접해 있다.비래동은 마을 북동쪽 골짜기에 비래암이라는 암자가 일찍부터 있었으므로, 비래암의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 마을 이름도 비래리라 했다. 일설에는 꿩이 매에게 쫓겨 이곳에 날아왔다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
오랫동안 교통이 불편한 오지이자 가난한 어촌이던 충청도 서해안지방은 2001년 말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로 변했다. 그중에서도 서천의 마량리 포구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어촌이고, 또 조선시대 수군영지였다는 역사적 유산과 함께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한군데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더욱 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