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현실의 벽에 맞닥뜨리게 되어 그 소망을 접어두고 산다. 그러한 현실을 기준삼아 나를 비추어 보면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 직업으로 연결되었다. 또 기록사진을 기반으로 한 학문적인 논문으로 완성했고 일련의 작업들이 진행중이다. 이러한 과정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나를 꽤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동안 내 시각과 사고를 표현한 다양한 카메라와 장비들은 대부분 떠났고 지금은 넉 대의 카메라가 내손에 남아있다. 사진과 나의 인연은 고교시절 둘째누나가 사다준 카메라로 인해서였다. 일제 Cosina인데 니콘이나 캐논처럼 최고 등급의 브랜드는 아니었다. 카메라가 생긴 기쁨에 필름을 사서 끼우고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학교에 가져가 친구들과 함께 찍기도 했다. 촬영을 마친 필름을 사진관에 갖다 주고 2~3일 뒤면 종이봉투에 담긴 3X4인치 크기의 흑백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20대 초반에는 뚜껑을 열고 위에서 파인더를 보는 중형카메라인 마미야 C220를 한동안 사용했다. 이 카메라는 두 개의 렌즈가 세로로 설계되었다. 위 렌즈는 촬영될 사물, 아래는 필름에 노출시켰다. 콤팩트형 카메라와 구조가 비슷하여 너무 가까이 촬영을 하면 시각차가 발생했다. 이후 사용한 니콘 FM2는 기계식 카메라여서 튼튼하고 잔고장이 별로 없었다. 배터리는 노출계 작동만 관여해 만약 방전이 되어도 촬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1988년 대전일보 기자로 입사해 다양한 장비를 접하고 사용했다. 사물을 원처럼 왜곡되게 촬영하는 초광각렌즈인 어안렌즈, 넓은 화각의 광각줌렌즈, 표준계열의 줌렌즈, 이미지를 크게 찍는 망원계열의 줌렌즈가 수납공간에 가득했다. 300mm와 600mm의 초망원렌즈는 주로 프로야구 같은 스포츠 경기에 사용했다.1990년 발생한 안면도 핵폐기물 처리시설장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시위 때에는 사진장비의 디지털화가 이뤄지기 전이라 많은 장비를 취재차량인 현대자동차 포니1에 싣고 갔다. 개인 장비와 망원렌즈, 사다리, 필름 현상장비, 인화장비를 챙겨야 했다. 거기에 사진전송 장비까지 싣고 현장에 도착, 욕실에 창이 없는 여관을 얻어 암실을 만들었다. 현장에서 파출소가 불타는 장면을 찍어 여관 암실로 돌아와 현상을 시작했다. 필름을 감은 릴을 현상탱크에 넣고 불을 켠 뒤 온도를 맞춘 현상액을 붓고 반복된 교반을 했다. 정지액, 정착액을 넣어 현상을 마친 후 수세과정을 거쳤다. 빠른 건조를 위해 알코올에 몇 초 담궈 헤어드라이어를 사용, 건조시켜 확대기에서 사진을 인화했다. 이것을 드럼형태의 사진전송기에 감아 여관의 전화선을 이용해 전송했는데 1장당 약 5분씩 걸렸다. 지금은 니콘 디지털카메라 두 대와 필름을 사용하는 대형 뷰카메라 두 대를 사용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는 현장 헌팅용이나 외부에서 사진 원고를 요청할 때 주로 사용한다. 렌즈는 광각줌, 표준줌, 망원줌, 매크로렌즈를 사용한다. 두 대의 뷰카메라는 4X5인치 필름과 8X10인치 필름을 사용하는데 컬러슬라이드는 현상소에 맡기고 흑백작업은 직접 현상해 밀착인화와 확대인화를 한다. 디지털 보다 번거롭고 기동성이 떨어지며 비용이 많이 드는 아날로그 대형카메라 사용은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검은 차광 천을 뒤집어쓰고 보는 뷰카메라에 비친 세상과 풍경은 현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큰 필름의 장점인 높은 해상력은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진의 특장(特長)을 부각시킨다. 나는 쉬운 과정으로 완성된 사진은 대부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필름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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