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비(碑)가 있었다는 송파(松坡)나루에서 숫내를 건너면 고향집에 다다른다. 듣기로는 숫내처럼 들렸지만 알고 보니 숯내(炭川 탄천)였다.
숯내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아래 흐르는 물을 보면 발을 헛디디기 십상이니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서 지나야 한다. 여름장마나 태풍으로 다리가 떠내려가면 허리춤까지 차는 물을 건너야 하는데 작은 아버지 등에 업혀 가면서 등 위에서도 어린 마음에 가슴 졸였던 기억이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머리에 큼지막한 돌을 이고 내를 건넌다고 하는데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몸무게를 늘리는 지혜가 숨어있는 듯하다.
낙락장송 키 큰 소나무들이 하늘 높이 울타리하고 있는 마을 어귀(방죽머리)에 다다르면 이제부터 시골집이 있는 궁말(宮마을)이다. 조선조의 별궁이 있어 그리 불렀다는 데 지금도 광평대군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는 밤고개(栗峴 율현), 쟁골(紫陽 자양골), 좀 멀리는 깊은 골(深谷 심곡)과 안골(內谷 내곡) 등의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어른들은 지명을 순 우리말 예컨대 풍납(風納)동은 바람들이, 암사(岩寺)동은 바웃절이, 석촌(石村)동을 돌마리로 부르고는 했다.
여름에는 부엌 아궁이 외에 마당에 별도로 설치된 화덕에서 밥을 했는데 재속에서 강냉이나 앞 논에서 잡아온 메뚜기 가끔은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려 호박잎으로 싼 것 등 노릇노릇 구워진 걸 꺼내서 재를 후후 불고 먹으면 참 고소했다.
여름을 지나 하늘이 높아지면 고추잠자리도 덩달아 높이 날아 다녔는데 싸리 빗자루로 휘두르면 한 두 마리씩 걸리고는 했다.
수박과 참외 껍질 씨, 호박 속 긁은 것, 썩어서 도려낸 씨감자 등의 속은 모두 쇠죽을 끓일 때 함께 넣으면 그만이었다. 먹는 것과 약은 그 원천을 같이한다는 식약동원(食藥同源)의 전통방식으로 먹인 소에게는 구제역도 비켜간다고 한다.
쓰고 버린 허드렛물은 조그만 실개천이 돼 흐르는데 주변에는 채송화가 올망졸망 피어 있고 도랑에는 실지렁이가 모여 살면서 하수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타고 남은 재는 잿간에 널어놓으면 됐으니 사실 쓰레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요즘 말하는 환경친화적(Eco-friendly) 기술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전통생활 그 자체다.
추석이면 일가족이 시골집에 갔다가 산길을 걸어 청숫골 외갓댁에 다녀가곤 했는데 으슥한 굴 옆을 지나칠 때 “할아버지가 굴 안에서 눈을 번쩍이는 호랑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기도 했다. 다리가 아파 올 즈음 산등성이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꿀물이 뚝뚝 듣는 배를 깎아 먹다가 한 봉다리 사고 다시 무거운 발길을 옮기면 하늘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질 무렵 외갓댁에 당도하곤 했다.
청숫(淸水)골(청담동) 우물물은 차가워서 한여름에도 미리 떠놓아야 등목을 할 수 있는데 물컵에 따르면 콜라처럼 물방울이 톡톡 튀어오르곤 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님), 청담(淸潭)이라는 이름값을 했다.
추석이 다가오니 고향 생각을 해 보았는데 하지장(賀知章 655~744)이 고향에 돌아와 쓴 ‘회향우서’가 생각난다.
回鄕 偶書 (고향에 돌아가 우연히 쓰다)
少小離家 老大回 (소소리가 노대회) : 어려서 떠난 고향 늙어서 돌아오니
鄕音無改 鬢毛衰 (향음무개 빈모쇠) : 사투리 여전한데 귀밑머리 희어졌네
兒童相見 不相識 (아동상견 불상식) : 아이를 마주봐도 알아보지 못하니
笑問客從 何處來 (소문객종 하처래) : 웃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도리어 묻네
그는 9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이태백을 적선(謫仙;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평하고 두보와 교유하기도 했는데 관직에 50여 년 있다가 늘그막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의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어릴 때와 늙음, 변하지 않은 사투리와 하얗게 센 머리가 대조되는 한편 금석지감에 젖은 시인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대비되면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을 담담하게 잘 나타냈다는 평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