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단편 ‘운수좋은 날’은 행운을 꿈꿀 수 없는 계층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1920년대 식민지 시대에 가난한 계층의 불행을‘결정론’으로 단정 짓고 있는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작품에서 인력거를 끄는 김첨지는 병든 아내를 두고 무려 열흘 동안이나 돈벌이를 못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첫 손님으로 문안에 들어가는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태우고, 학생 손님까지 만나 1원 50전이나 받았다. 김첨지에게는 정말 ‘운수 좋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집에서 나올 때 아내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 술을 한잔 한다. 그는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들고 늦은 귀가를 하지만 웬일인지 아내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리를 버럭 지르며 방안에 들어갔을 때 아내는 이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 있었다.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오히려 더 큰 불행일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비정한 당시 상황인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이는 과장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었는데 그러한 상황이 90년대를 거쳐 오늘의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씁쓸할 때가 있다.얼마 전 학교에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요즘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 자녀들이 공부도 잘하는 반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은 학업성적도 뒤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형편이 어려운 집 자녀들이 공부를 빼어나게 잘해서 세인들에게 즐거움도 주고 부러움을 샀던 일이 비일비재 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될까.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턴가 돈 없는 사람은 공부도 잘 하지 못하고 그러기에 그들의 미래도 개선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얼핏 소외계층의 자녀들은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말로 들린다. 결국 각자의 미래는 각 개인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고 더구나 이러한 현상은 우리와 같이 경제성장의 분배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이 취약하거나 그럴 여유가 없는 나라일수록 더하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아득하기까지 하다. 너와 나,그리고 우리의 관계에서 내 몫을 설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내것’으로만 생각한다. 영원히 내 것이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가능할까. 이웃이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 있을까.요즘 우리는 언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업의 천문학적인 부의 숫자를 실감하지 못한다. 계층간 위화감은 자칫 우리사회의 소외계층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력마저 빼앗아버리는 것은 아닐까.비록 지금은 어렵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꿈꾸고, 설사 나는 가난하더라도 자식들은 풍요하게 되기를 믿고 살아온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지금 갖고 있는‘내것’은 아름다운‘나눔’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이웃의 풍요를 위해 써야 한다. 모두가 풍요해질 때 나도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한 기원(전 동양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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