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맨주먹의 CEO 이순신이다>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무과 도전 집중
<나는 맨주먹의 CEO 이순신이다>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무과 도전 집중
  • 김덕수
  • 승인 2014.06.10 0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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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이순신 가문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방씨 부인과의 결혼으로 이순신 부자반열에 오르다②

공주대 교수

이순신은 21세 때인 1565년에 상주 방 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한미한 집안의 청년 이순신의 결혼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동고(東皐) 이준경(1499~1572년)이 중매를 섰다는 사실이다. 그 바람에 이순신은 방진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방진은 보성군수를 역임했지만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출세하지 못했다. 또 그가 무과시험에서 급제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슬하에 방연희라는 이름을 가진 딸 하나만을 두었던 방진은 훌륭한 사윗감을 통해 자신이 못다 이룬 고관대작의 꿈을 실현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가 훗날 이순신에게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준경은 성종이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렸을 때, 그것을 들고 가서 폐비 윤 씨의 죽음을 집행했던 형방승지 이세좌의 손자였다. 그는 약관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공로로 성종시절에는 승승장구했지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연산군은 1504년 4월 9일 이세좌에게 “목을 매서 자살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5월 4일에는 그의 네 아들(수원, 수형, 수의, 수정)을 교수형에 처했다.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형 윤경과 함께 충북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던 이준경은 이수정의 아들이었다. 만약 중종반정이 없었다면 그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의 운명 또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준경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었던 명종이 후사 없이 죽는 바람에 왕실의 적통이 끊기자 왕비였던 인순왕후 심 씨와 논의해서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 씨의 손자 하성군 이균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다름 아닌 선조였다.

그런 이준경이 아산의 외가댁 근처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순신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 방진과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순신을 그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었을까? ‘이충무공전서’와 ‘이순신세가’를 비롯한 이순신 관련 책자나 인터넷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는 극히 제한적이다.

즉 ‘이준경은 자신의 이웃에 살았던 이순신이 10대 중·후반의 나이 때 한양의 친구들에게 한문 공부를 시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의 재능과 인간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준경과 방진은 동문수학했으며, 이준경이 병조판서로 재직할 때 그의 휘하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것이 전부다.

방진은 그런 인연을 계기로 이준경을 찾아가서 데릴사위로 손색이 없는 사윗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이준경은 자신이 일찌감치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을 적극 추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순신은 이준경의 도움으로 방진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방연희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방진은 온양지역에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큰 부자였다. 방진의 데릴사위가 된 이순신은 그의 정신적 격려와 경제적 후원 속에서 무과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한편, 장인어른 방진과 장모 남양 홍 씨가 사망하자 방진 부부의 모든 경제적 기반은 데릴사위였던 이순신에게 상속되었고, 마침내 그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근거는 1594년 1월 14일자 ‘난중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받아보니 “아산의 산소에서 설날 제사를 지낼 때에 패를 지어 모여든 무리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러 올라왔다가 물러갔습니다”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이는 1594년 당시 이순신의 아산 집이 매우 큰 부자였음을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사료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남의 제사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그 먼 산속까지 몰려왔다는 것은 곧 그의 집이 아산 일대에서 제일가는 갑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그 동네에서 어느 집이 가장 잘 사는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린다. 그렇지 못하면 굶어죽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비록 두 형(희신, 요신)이 일찍 사망했지만, 이순신이 어머니 초계 변 씨를 자신의 집에서 모셨던 것도 그가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더 잘 살았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아산으로 낙향했을 당시, 그의 집안은 이재(理財)를 멀리하고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했던 조선의 일반 선비들이 흔히 경험했던 생활고를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순신이 방진의 데릴사위가 되면서부터 그 집안의 경제력이 크게 신장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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