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의 광복운동이 허사가 되다.①

위관은 함거 실은 수레 두 대를 몰고 밤을 도와 성도로 들어갔다. 첫닭이 울 때 등애의 부장들이 격문을 보고 깜짝 놀라 모두 위관 앞에 넙죽 엎드려 절했다.
이때 등애는 장군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위관이 이때를 노려 힘을 내어 수하장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조서를 받들어 죄인을 잡으러 온 천자의 군사다. 등애 부자를 잡아라!”
명이 떨어지자 날래게 등애를 덮쳤다. 등애가 자다가 일어나 일을 당한 것이다. 위관의 목청이 쩌렁쩌렁 장군부를 울리기를

“등애를 결박해 함거에 실어라!”
명령과 실행이 같았다. 무사들이 신바람을 내어 등애를 묶어 함거에 실었다. 등애는 자다가 일을 당했으니 무기가 있을 수 없다. 빈손으로 전혀 대항을 못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위관에게 당한 것이다.
한편 등애의 아들 등충도 급한 소식을 듣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러나 마구 들어 닥친 무사들에게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결박하여 함거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부중에 있던 장수며 아전들도 이 소란 통에 놀라 무기를 들고 뛰어 나왔으나, 지휘자가 없으니 무기를 써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건너편 산모퉁이에서 티끌을 자욱하게 일으키며 큰 군마가 다가왔다. 가까워져서 살펴보니 종회의 군사다. 장수와 아전들은 지레 겁을 먹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말에서 내려 부중으로 들어와 보니 등애부자가 결박 지워 함거에 실려 있었다. 종회가 채찍을 들어 등애의 머리를 가리키며 꾸짖기를
“송아지를 치던 아이놈이 겁 없이 어찌 역적질을 꿈꾸었느냐?”
종회의 말에 곧 뒤를 이어 강유가 소리치기를

“이놈 등애야! 마천령을 굴러서 요행수를 얻더니 이제 이 꼴이 뭐냐? 전략도 추잡한 전략을 쓰더니 천벌이 내린 모양이다.”
“잔소리 마라! 꿩 잡은 놈이 매라는 것도 모르느냐? 패군지장이 말이 많다. 창피를 모르는 강가야! 더 흉한 욕설이 터지기 전에 내 앞에서 꺼져라!”
세 장수의 입은 걸었다. 주고받는 이야기도 고단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종회의 입에서 떨어진 명령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종회는 등애가 함거 안에서 발악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명하기를

“군사들은 들어라! 어서 등애부자의 함거를 낙양성중으로 옮겨라!”
이 한 마디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었다. 촉나라를 마천령을 넘어와서 취한 등애로서는 영욕이 모두 다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 되었다. 함거가 철거덕 소리를 내며 멀어지자 종회가 미소를 지으며 강유에게 말하기를
“강장군! 내가 오늘날에야 비로소 평생의 원을 다 풀었소.”

“종사도! 옛적에 한신이 큰 공을 세우고도 괴통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미앙궁에서 참혹하게 죽었소이다. 대부들이 범여가 오호에 배를 띄운 일을 본받지 않는 한 칼 아래 이슬로 사라질 것입니다. 한신과 범여 두 사람을 비교해 볼 때 어찌 두 사람의 공명이 혁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신은 비명횡사하고 범여는 천수를 누리고 와석종신했으니, 범여가 한수 위가 아니었을까요? 한신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기미를 차리지 못한 때문에 화를 당했습니다. 이제 종사도께서는 큰 훈업을 이미 성취했고 위엄이 천자보다 더하니, 그만하다면 배를 강호에 띄워 종적을 감추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더 욕심을 낸다면 아미령(娥嵋領)에 올라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는 것이 어떨까요?”

“강장군의 말이 옳소 마는 내 아직 40이 못된 적은 나이오. 바야흐로 진취할 시기인데 어찌 물러앉아 한가롭게 놈팽이 흉내를 낸단 말이오.”
“종사도 말씀 잘하셨소. 만약 한가롭게 지내기 싫다면 일찍부터 양책을 강구하십시오. 이것은 종사도의 지력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고 강유의 조력 없이 결정하실 일이라 봅니다.”
“백약이 이미 나의 마음을 읽었구려.”
“무례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지 아니야. 우리는 형제지의를 맺은 사이가 아니오.”
종회가 형제지의를 말하였다. 두 사람은 이후부터 더욱 더 가까워져 날마다 대사를 두고 의논했다.
이무렵 강유는 후주에게 밀서를 보내기를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조금만 더 욕을 참으시옵소서. 강유가 사직을 다시 편안케 하고 일월이 광명을 되찾는 날을 만들어 한실이 굳건히 일어서게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용기와 희망을 주는 밀서를 받고도, 후주는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한 듯이 히죽이 웃기만 하였다. 어쩜 후주는 그의 아버지 선주와는 달리 너무나 보호받고 자란 때문에 무골호인(無骨好人)이었나 보다. 그에게서 독립심이나 의지력을 찾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흔히 오냐 자식으로 기른 아이가 성장하여 후레자식으로 된 것을 왕왕 보는데, 후주는 제 아비 현덕의 기업을 잃고도 손톱만큼의 자책도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를 쓴 사가들이나 소설가들이 다 같이, 천수니 기수니 운이니 하여 진나라가 일어날 천운이라 운운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진나라를 세운 사마소의 삶을 반추해보면 그 아버지 사마의와 형 사마사로부터 확실한 제왕교육을 받았음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반면에 후주 유선은 전장도 한 번 치르지 않고 고통도 모른 채 제왕의 자리를 거저 얻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결국 십상시의 난에 비유되는 황호의 발호로 말미암아 눈을 뻔히 뜨고 나라를 내어 준 것이다. 더구나 공명이나 백약과 같은 유능한 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분 활용할 능력이 없었다. 후주는 전국시대의 격랑에 비추어 볼 때 임금으로서 자격 미달이고, 유능한 신하들에게 짐이 된 미숙아 같은 존재였다. 그것이 후주 유선의 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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