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경원알미늄

㈜경원알미늄 양동철대표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제 자리에 안주하는 법이다. 개미도 베짱이 되기 십상인 순간일 수 있다. 목표를 두고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게끔 등 떠미는 귀찮은 구속일 수 있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채찍이다.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하지 않는가. 더욱이 목표가 이기적이라면 제 팔자지만 다소 이타적이라면 봇짐은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무거우면 어떠랴. 꿈을 설계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일 수 있는 것을. ㈜경원알미늄 양동철(47) 대표가 그 꿈을 말한다. 대전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을 만들어 보겠단다. 그의 말마따나 3D 업종이다. 어울리지 않는 장밋빛인가 싶지만 CEO 스스로 부단히 자문하고 연마하는 기업이라면 가당한 빛이 아닐까 싶다.

#1. 사업의, 사업에 의한, 사업을 위한
본적은 없지만 태어날 때 금 수저를 물고 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물려받은 게 많아 소싯적부터 제 땀 냄새도 모른 채 사장님 소리 듣는 이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사업이라는 게 생각처럼 그리 녹록한 게 아닌데 가진 게 청춘밖에 없었던 그는 일찌감치 사업을 인생 항로로 정했다.
“아버님이 고향(논산 은진)에서 축산업을 하셨어요. 그리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뵈며 내가 사업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논산 연무대기계공고에서 선반을 전공한 그는 군 입대 전 젊어 고생을 자처했다. 군 제대 후 5년간 직장 생활도 사업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삼았다.

“일 배우려 한 것은 아닙니다. 직원들의 고충을 읽어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오너의 자질을 연마하기 위한 일종의 수련 시간이었습니다. 한 2년이면 될 줄 알았어요. 그렇게 5년을 보냈는데 아직도 수련 중입니다.”
사업가의 첫 발은 동업이었다. 1997년 5월의 일이다. 하필이면 몇 개월 만에 대한민국이 ‘IMF’ 시련의 한 복판을 관통하던 그 해 가을을 마주한다.
“직원 급여가 많게는 6개월 밀렸습니다. 참 답답했죠. 역으로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산 것 같아요.”

이듬해 홀로서기를 한다. 적성에 맞고 당시로서는 덜 대중화됐던 알미늄 창호와 철물에 주력했다. 간판은 진성건업. 참 진(眞) 이룰 성(成). 그 때는 성실하면 되는 줄 알았다. CEO의 책임감 같은 것을 따져볼 겨를이 없었을지 모른다.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진성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은 거예요. 사업은 이윤 창출이 생명줄인데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하기야 이름 바꾼다고 기업이 반전을 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2004년 주변 분들이 추천한 ㈜경원알미늄으로 새로운 시작을 도모했습니다.”

진성으로 시작한 1998년부터 2008년 언저리까지 약 10년 동안 ㈜경원알미늄의 연 평균 매출은 8억 5000만 원 선이었단다. 전형적인 정체기 그래프다. 중요한 것은 회사 이름이 아니라 타성에 젖은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친 것이 2008년 무렵이다.

#2. 알에서 깨어나다
“IMF의 후유증을 만회하고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문득 지나온 10년이 제게 화두를 던지더군요. 크게 이룬 게 없습디다. 그 원인이 어디 있나 곰곰이 따져보니 사업가로서 고객에게 도움이 되고 베풀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데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IMF 때도 걱정을 안 했습니다. 젊었으니까요. 그런데 40줄에 접어드니 미래에 대한 걱정이 들더군요. 양껏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답은 항상 제 옆에 있었어요. 리더로서 제대로 끌어가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공부에 매진하게 됐습니다.”

10년 묵은 매너리즘과의 한 판 승부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자신이 진단한 과거 10년에 대한 처방을 스스로 냈고 이내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인터뷰 전날(6월 9일)도 서울을 다녀왔다고 했다. CEO 모임에서 문답풀이를 구했단다. 마케팅 전략과 아이템은 완비했으나 리더십에 아쉬움이 있다는 끊임없는 최면이 그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서재에 두서없이 꽂힌 책들이 공부하는 CEO의 의지를 대변한다. 2009년부터 비전을 도안하며 제2의 도약을 꿈꿨다. ㈜경원알미늄의 올 매출은 100억 원 선이다. 2008년과 단순비교하면 6년 만에 11배가 넘는 성장을 이뤄낸 힘은 여전히 자가발전 중이다.

#3. 3D 업종이 살아남는 법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다보니 직원들이 다소 버거워했다. 조급증이 발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과거보다 목표가 커졌고 부단히 담금질해야만 했다.
“회사 구성원이 먼저 성장해야 회사가 성장합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미는’ 구조죠. 저는 이를 동반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잘 따라주는 직원들이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필요한 것은 속전속결이었다. 절박했다. 경쟁자들이 앞서 간 시점에서 살아남는데 그치지 않고 반등하자면 그 길밖에 없었다. 하도급을 대행하던 과거를 접고 업종을 창호 알미늄으로 집중하며 한 우물을 팠다. 단언컨대 그저 메탈인 알미늄에 ‘환경과 에너지를 생각하는 기업’을 덧입힌 전략은 주효했다. 트렌드가 그랬다. 녹색기술인증·환경표지인증을 받고 관련 특허까지 확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만큼 가속 페달을 밟았다.

중소기업의 설움이라고 할까. 가뜩이나 열악한 인프라에 그것도 3D 업종이다. 고액의 연봉을 주고 솜씨깨나 있다는 전문가들을 데려다 써 봤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조직에 녹아 들 수 있는 신입들을 까다롭게 채용해 순환근무를 시키며 ‘조직원’으로 다듬는 중이다. 기본기가 ‘생명’이라는 신념은 그에게 불변의 가치다. 무엇보다 양 대표 자신을 채근하며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실천하고 있다.

#4. 15·1·100·100
“갈 길이 멀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유망중소기업 선정은 저희가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죠.”
겸손한 자평이다. 그가 꿈꾸는 ‘15·1·100·100’이 경원알미늄의 좌표다. 2015년에 1인 평균 연봉 1억 원, 종사원 100명,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게 난수표 같은 ‘15·1·100·100’공식이다. 목표연도로 볼 때 수월찮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과 6∼7년 전 8억 5000만 원이던 매출이 올해 100억 원으로 몸집을 불렸다. 적어도 네 개의 목표 중 하나는 조기 달성한 셈이다.

“직원들에게 매년 매출을 2배 이상 성장시키자고 독려했습니다. 무모한 도전일지 모르지만 단 시일에 성장한 회사들의 전례가 있으니 우리라고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봅니다.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데 아직은 직원들 성에 차지 않을 겁니다.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주5일제 근무를 단행했다. 소소하지만 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일을 챙기고 학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첫 술에 배부르랴. 그의 포부라면 ‘기다림의 미학’도 발휘할 만해 보인다.
“업계의 탑으로 대전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을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회사요.”

글 이인회·사진 김상용 기자 sindong@ggilbo.com
 

 


㈜경원알미늄(www.kw202.co.kr)은.
국내 최고 성능의 에너지소비효율등급제품과 제품 관련 녹색기술인증·환경표지인증 등 다수의 품질인증과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알미늄 창호 제조업체다. 알미늄 창호에 대해서는 설계부터 내역산출, 시공까지 완벽한 최상의 품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준비된 시스템을 구축했다. 직원은 30여명. 본사는 대전 유성구 교촌대정로 202에 위치해 있으며 논산과 청원 등 3곳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2011년 ISO 9001:2008 국제인증과 경영혁신 중소기업 확인서를, 이듬해에는 고효율에너지기자재 인증서, 환경표지인증서, 녹색기술인증, KS인증, 품질인증 Q마크를 획득했다. 지난해에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했고 벤처기업확인서와 기술혁신 중소기업(INNO-BIZ)인증을 받는 등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탄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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