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고전번역가

김기의 [한시감상] 37
- 題伽倻山(제가야산) -
狂犇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하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하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을.
- 가야산에서 짓다 -
쌓여진 바위 위를 질주하여 겹겹의 산자락에 소리를 울리니,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간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늘 시비 다툼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계곡 물소리로 하여금 온 산을 뒤덮게 하네.

◆지은이 최치원(崔致遠) : 신라 말기의 대학자.
이 시는 속세와 단절을 이루게 하는 가야산(伽倻山)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서 지은 시이다.
가야산을 해인사(海印寺)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홍류동 계곡이 있다. 계곡에는 영겁의 세월동안 물과 바람에 다듬어진 바위들이 가득 늘려있다. 계곡 위를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위에는 푸른 노송(老松)이 빽빽이 솟아 있다. 계곡 사이에는 맑고 푸른 물결이 온 산천을 울리면서 콸콸 흐르고 있는데, 계곡 가에 있다보면 물 흐르는 소리에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된다.

지은이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신라 조정에 나아갔으나 시비에 휘말려 뜻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버리고, 신선을 꿈꾸며 팔고의 명산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지은이가 가야산을 찾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를 시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탐욕에 의해 일어난 인간 세상의 소음이 침범치 못하게 보호막을 치는 소리로 여긴 것이다.
지은이에게서 가야산은 특별하다. 그는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 도량 옆에, 나무 지팡이를 꽂아놓고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한다. 그때 지팡이를 꽂아두었던 그 자리에,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가 지금까지도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나무를 최치원이 꽂아둔 지팡이가 다시 살아나서 된 나무라 말한다.
이 시는 지은이가 가야산의 계곡 물소리를 통하여, 티끌 없는 세계를 동경하는 간절한 뜻을 드러낸 작품이다.

김기의 [한시감상] 38
- 絶句(절구) -
滿庭月色無煙燭(만정월색무연촉)이요,
入座山光不速賓(입좌산광불속빈)을.
更有松弦彈譜外(갱유송현탄보외)하니,
只堪珍重未傳人(지감진중미전인)을.
- 짧은 노래 -
뜰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이 밝혀주는 촛불이요,
자리에 비쳐드는 산빛은 부르지 않아도 오는 손님이네.
소나무 거문고는 악보 밖의 곡조를 연주하니,
다만 귀중히만 여길 뿐 남에게 전해줄 수가 없네.

◆지은이: 최충(崔冲)은 고려 성종과 문종 때의 대학자.
이 시는 달과 산, 소나무와 바람을 소재로 삼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바로 자연의 소리이다. 우리 모두는 자연의 산물이기에, 일시적으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음악에 끌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본능이듯, 사람이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하는 것도 또한 본능인 것이다. 인위적인 음악도 자연의 소리를 담게 된다면, 만인으로 하여금 감명과 찬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소나무가 가지와 잎을 드리우고 있을 때, 맑은 바람이 지나가면 기묘한 소리가 난다. 자연스럽게 자란 소나무는 천하 제일의 명공(名工)이 만든 거문고요, 스쳐 지나가는 맑은 바람은 천하 제일의 연주가인 것이다. 천하 제일의 거문고를 천하 제일의 연주가가 타니, 그 소리 또한 천하 제일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이 소리가 달빛이라는 조명과 산 빛이란 관객이 있는 가운데 울리고 있으니, 아름답고 멋스럽기가 그 얼마이겠는가. 지은이는 자연 속에 이처럼 조화로운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감동에 젖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는 다른 데로 가져 갈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혼자만 감상하기에 아까워 남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내어보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작품에서 시각과 청각을 통해 감지되는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를, 거문고 연주에 비유하여 훌륭히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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