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한시감상] 47
- 甲山邑館(갑산읍관) -
綠水靑山幾萬里(녹수청산기만리)인가.
雲烟掩靄有無中(인연엄애유무중)을.
居民但自知耕鑿(거민단자지경착)하니,
淳朴依然太古風(순박의연태고풍)을.
- 갑산(甲山) 땅의 읍관(邑館) -
푸른 물 푸른 산은 몇 만 리이던가.
구름 연기 자욱하여 보일 듯 말 듯 하여라.
백성들은 스스로 밭 갈고 샘을 팔 줄 아니,
순박한 민심은 여전히 태고적 모습 지녔구나.

◆지은이 정흠지(鄭欽之) : 조선 세종 때 문신.
이 시는 갑산(甲山) 땅이 가진 산천의 모습과 그곳 주민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읊은 시이다.
지은이의 행적을 보면 한때 함경도 관찰사로 봉직하기도 했었다. 아마 이 시는 그 시절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갑산 땅은 함경남도 동북부에 있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삼수(三水)와 함께 귀양지로 유명하다. 산이 깊고 골짜기가 험하여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奧地) 중의 오지이다. 오죽했으면 나라에 중죄를 범한 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겠는가. 가기도 어렵고 오기도 어려운 곳이 바로 삼수·갑산 땅인 것이다.

이 땅에는 세상의 티끌이 침범하지 못하고 임금의 권세도 쉽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 백성들은 배고프면 밭을 갈고 목마르면 샘을 파서 목을 축여가면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자치적으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백성들은 간교한 꾀를 낼 줄 모르고, 오직 천연의 성질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보는 것이 산이요 듣는 것이 물소리인데, 산은 인자한 스승의 얼굴이요 물소리는 지혜로운 스승의 음성인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인자하고 지혜로운 스승과 함께 생활을 해가니, 한 순간도 마음이 탁해질 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백성들은 모두 순박한 심성을 가져, 마치 태고적 사람인 듯 여겨지는 것이다.
이 시는 갑산 고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읊었지만, 감상자에게는 그곳에 대한 동경심을 유발시키기니, 또한 좋은 작품이라 할 것이다.

김기의 [한시감상] 48
-傷春(상춘)-
茶甌飮罷睡初醒(다구음파수초성)한데,
隔屋聞吹紫玉笙(격옥문취자옥생)을.
燕子不來鶯又去(연자불래앵우거)하니,
滿庭紅雨落無聲(만정홍우락무성)을.
-봄을 아쉬워하다-
찻잔을 들이켜 막 졸음에서 깨어나는데,
붉은 옥의 생황 소리 집 밖에서 들려오는구나.
제비도 오지 않는데 꾀꼬리 마저 가버렸으니,
뜰에 가득 붉은 꽃은 소리 없이 지는구나.

◆지은이 신종호(申從濩) : 세조 2년~연산군 3년 사이의 문신.
이 시는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가슴 시리게 읊어낸 작품이다.
봄이 오면 만물들은 활기차게 움직인다. 인간들도 이에 덩달아 상춘객(賞春客)이 되어 봄나들이를 한다. 그러다가 봄이 다 지나가면, 들뜬 기분으로 봄을 감상하는 상춘객(賞春客)들은, 도리어 떠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슬픔에 젖은 상춘객(傷春客)으로 변하게 된다. 이 시는 바로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상춘(傷春)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인 것이다.

끝나는 봄을 만난 지은이는 생기(生氣)가 다하여 피곤증(疲困症)을 느꼈다. 그래서 졸음이 마구 쏟아지는데, 한 잔의 푸르스름한 찻물을 들이키고 나니, 정신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이 순간 누가 무슨 사연을 안고 타는지 모를 생황 소리가 집밖에서 들려와, 지은이의 관심을 만춘(晩春)의 현실 세계 속으로 향하게 했다.

얼마 전만 해도 마당에는 제비가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버들가지에는 꾀꼬리 자태를 뽐내며 노닐고 있었는데, 봄이 다하자 지금은 더 이상 제비도 모여들지 않고, 어여쁜 꾀꼬리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순간 허전함이 몰려오는데, 정원을 바라보니 활짝 피었던 꽃마저 꽃잎을 하나둘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 소리도 없이 말이다. 지은이의 봄을 보내는 슬픔은 아마 이 순간을 맞아 절정에 다다랐으리라.
한 번 번성하면 다시 쇠락하는 것은 대자연의 법칙인 줄 누구나 알지만, 그러나 막상 쇠락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는 슬픔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시심(詩心)이 풍만한 시인에게는 그것이 더하다.
지은이의 이 시 속에는 ‘슬프다’, 또는 ‘아쉽다’는 등의 글자가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러한 감정이 아주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말구(末句)에 “뜰에 가득 붉은 꽃은 소리 없이 지는구나”의 구절은 안타까움이 뼈를 저리게 한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