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대전민예총 이사장)

최근 군대 내 폭행과 이에 따른 일탈행위 등이 크게 사회문제화 되면서 군대 내 인권정책의 필요성이나 모병제 등 다양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사실 군대 내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군 복무가 국민의 의무로 강조되는 우리나라에서 대다수 군필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몸으로 겪어봤을 터다.

나는 대학원을 마치고 27세의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3년의 복무기간에 본적지에 모여 단체로 입대하던 시절이라 지역별로 계급이 갈리니 왜곡된 지역감정까지 더해져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구조였다. 나는 국문학과를 졸업했는데도 예비사단의 공병대로 배치를 받았다.

병장은 충청도, 선임상병은 강원도, 후임상병은 전라도, 일병은 경기도였다. 중장비 자격증을 소지한 지원병이 많은 공병대인지라 20대 초반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할배’로 놀림을 받았지만 단체기합이 아닌 경우엔 그리 심하게 당하진 않았다.

다들 어려운 집안의 시골 출신이라선지 순박한 인간미가 있었다. 더구나 공사 현장에서 똑같이 땀 흘리며 질통을 지고 지붕을 오르내리는 날은 대개 취침 점호였으니 성추행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제대 후 50대 초까지 군대 꿈을 꿨는데 물리적 폭행보다 인격적 모욕감 등이 더 깊은 상처로 남아 지금도 군대 이야기엔 별로 흥미가 없다.

군대 내 폭력 문제가 불거진 뒤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융성위원회에 참석해 인문학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군대 폭력의 원인으로 교육을 꼽았고, 대통령께 할 말은 하겠다며 선출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또한 교육이 문제라며 이에 화답했다.

그런가 하면 지역 문화예술인 간담회 자리에서도 지역문화예술의 차세대 계승이 어렵다는 문제를 제시하며 그 원인으로 학업성적 위주의 입시교육 때문에 젊은이들이 예술적 끼를 발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래저래 모든 사회문제의 원흉은 결국 교육인 셈이다.

교육엔 가정교육과 사회교육도 포함되며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계승시키는 역할을 모든 교육이 담당함을 고려하면 그런 지적은 책임 떠넘기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 폭력적 사회구조 유지에 교육의 책임이 상당함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지금도 기득권층의 의식을 지배하는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교육에 그 근원적 책임이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이나 군대생활의 상당 부분의 악습이 식민지 교육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이런 식민교육의 영향으로 화합과 배려보다는 대립과 배척이 오랜 인습으로 사회 각 부문에 남게 된 것이고, 이런 가치관이 교육계와 군대문화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대나무 뿌리로 아이들을 심하게 매질하며 ‘조선 놈들은 맞아야 돼’라고 꾸짖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군대 내 폭력의 대물림 또한 일본 군국주의 잔재다. 우리는 지금도 경제력과 학력, 종교 등으로 서로를 편 가르고 끊임없이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베 노부유키’의 예언이 우리 생활 속에서 확인되니 섬뜩하지 않은가.

우리 민족처럼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라가 드물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지역으로 편을 가르고, 신앙으로 남을 폄하하고, 경제력으로 사는 곳이 갈리고, 성적으로 학교나 지역이 나뉜다. 가히 분열의 사회라 할 만하지만 이를 선택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로 미화하고, 이를 지적하면 이념의 잣대로 재단해 낙인찍으려 덤빈다.

친일독재 미화로 크게 지탄을 받았던 특정 국사 교과서가 교육부의 수정 권고조차 지키지 않은 채 내년도 채택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바로 식민지 교육을 내재화한 우리 사회의 맨얼굴이 아닌지 부끄럽다. 세계 최고의 학력을 자랑하는 핀란드는 우리보다 더 열악한 자연환경에서도 ‘함께하는’ 교육의 힘으로 복지국가를 이뤘다. 그들은 성적으로 학교 형태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인적자원이 함께 공부하는 교육을 법으로 강제한다. 좀 걸음이 느린 사람과도 기꺼이 함께 가는 그런 삶과 교육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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