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한시감상] 51

-書懷(서회)-
處獨居閒絶往還(처독거한절왕환)하야,
只呼明月照孤寒(지호명월조고한)을.
憑君莫問生涯事(빙군막문생애사)하라.
萬頃烟波數疊山(만경연파수첩산)을.
-글을 읽다가-
홀로 한가히 머물러 왕래를 끊고서,
다만 명월(明月)을 불러 쓸쓸한 나를 비추게 하네.
그대에게 부탁하나니, 인간사를 묻지 말라.
안개 낀 만경창파(萬頃蒼波)와 몇 겹의 산이라네.

◆지은이 김굉필(金宏弼) : 조선 성종 때의 도학자(道學者).
이 시는 자연세계를 동경하는 심정을 실감나게 드러낸 작품이다.
지은이가 생존했던 시기의 유학(儒學)은 이론보다는 실천 윤리를 중시했었다. 이러한 학풍 위에 지은이는 ‘소학동자(小學童子)’라 불릴 만큼 실천 윤리에 힘을 기울였다. 지은이가 처음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갔을 때, 김종직은 실천 유학의 교과서인 『소학(小學)』을 알뜰히 배우기를 권했다. 이로부터 지은이는 『소학』을 독실히 공부하여, 마침내 뛰어난 도학군자(道學君子)가 되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사람의 왕래를 다 물리치고 홀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지은이의 내심에는 필시 티끌 세상을 멀리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고독함이 있다해도 사람을 부르기보다는, 명월(明月)을 불러 벗하여 놀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깊은 사색에 잠길 때는 묵묵히 빛만 내려 보내주는 명월이 둘도 없는 반가운 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3, 4구에서 와서는 자연을 흠모하는 그 마음을 마치 선문답(禪問答) 하듯 생동감 있게 함축적으로 표현하여, 감상자의 가슴에 바로 와 닿게 하고 있다. 즉 인간사를 나에게 묻지 말라고 하면서 읊기를, “안개 낀 만경창파(萬頃蒼波)와 몇 겹의 산이라네”라 했다.

이는 인간사에 대한 정의로는 전혀 엉뚱한 답인 것이다. 이 구절 속에는 산수를 사랑하는 지은이의 그 심정이 무한의 밀도로 압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은이에게서 인생이란 바로 아름다운 산수(山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시는 자연과 합일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고결한 그의 인품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김기의 [한시감상] 52

- 挽宮媛(만궁원) -
宮門深鎖月黃昏(궁문심쇄월황혼)하니,
十二鍾聲到夜分(십이종성도야분)을.
何處靑山埋玉骨(하처청산매옥골)가.
秋風落葉不堪聞(추풍낙엽불감문)을.
- 궁녀를 애도하다 -
황혼녘 달 떠오를 때 궁문을 굳게 잠그니,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밤이 왔음을 일러주네.
어느 청산에 옥골(玉骨)을 묻을 것인가.
추풍(秋風)에 낙엽 지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지은이 이희보(李希輔): 성종(成宗)과 명종(明宗) 간에 살았던 문신.
이 시는 어느 궁녀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태어나면 죽는 것은 모두의 숙명이다. 그러나 비록 죽음이 숙명이라 해도 한없이 처량하고 서글픈 죽음은, 바로 한 번 태어나 인생의 낙을 알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져간 옛 궁녀들의 죽음인 것이다.

궁녀들은 열 살 전후 시절에 여러 가지 사연을 머금고, 정든 집과 부모형제, 그리고 동무들과 헤어져 세상과는 단절된 구중(九重)의 궁궐살이를 시작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온갖 기능과 궁중의 삼엄한 법도를 배우다가, 스무 살 전후가 되어 정식 나인이 되고, 다시 15년이 지나 상궁이 된다.

한 번 궁궐 안에 들어 온 궁녀들은 중병이나 심한 가뭄, 또는 모시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외에는 종신토록 궁궐 밖을 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궁중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밤에 한 궁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민의 정을 느껴 붓을 들었다. 화사한 자태는 어제의 모습인가 했더니, 오늘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허나 목놓아 울어줄 이도 없고, 또 뼈를 묻어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가엾기 그지없는 신세인 것이다.

이에 지은이의 흉중에는 한 줄기 서글픈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데, 때마침 추풍(秋風)에 낙엽 지는 소리가 들려와 슬픔의 감정이 극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不堪聞(불감문)’, 즉 ‘차마 듣지 못하겠네’란 말로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옥골'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추풍낙엽’을 대비시켜, 죽음을 아까워하는 정을 극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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