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 의 악몽 벗고 대전역에 내리다

 

어디를 가는 기차를 타도 세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시절이라 요즘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나이 먹은 사람에게 대전역은 가락국수와 동의어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혹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기 위해 새벽 나절에 나와 기차를 타도 저녁이 다 돼야 도착하던 시절, 대전은 점심을 먹는 역이었다.

누구는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고 누구는 계란을 싸오기도 하고 했지만 대전역에 10분 정차하는 동안 먹을 수 있었던 가락국수는 언제나 기가 막혔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지금과 별다를 것도 없었던 가락국수인데, 그때는 그 가락국수 한 그릇이 무엇보다 맛이 있었다.

객지로 혹은 고향으로 가는 골목에 서서 엄마마냥 오랜 기차여행의 배고픔과 고달픔을 달래줬다. 지금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곳에 불과하지만 한나절이 걸려 도착하는 역에는 간이역이든 큰 역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사연이 고였다. 마치 뒤란처럼 말이다.

아직 채 추위가 가시기 전 봄의 문턱에서 한 소년이 누나의 손을 잡고 서대전역에 도착했다. 그때 그 소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의 자전 소설 ‘마린을 찾아서’를 빌어 말한다면 불과 하루 전에 있었던 ‘조성’의 한 중국집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 상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상은 늘 힘 약한 자들에게는 노근노근하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그래도 이런 세상에서도 ‘희망’이란 단어가 있어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희망의 끈을 놓으면 그만인 것을…” 하고 넋두리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없는 자들의 마지막 안식처이니까.

열네 살 소년은 그 마음으로 서대전역에 내렸을 것이다. 앞으로 2년 남짓 대전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고 어떤 일이 자신의 온 몸을 휘감고 돌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운명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정해진 시계에 박힌 초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해진 길을 소처럼 걸어가는데 자신만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가끔 힘이 들거나 견디기 어려울 때 이런 말을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말이다.

열네 살 소년의 운명도 어쩌면 오래 전부터 시인의,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걸어오고 있지 않았을까. 기차는 철길을 달려 목적지에 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수도 있고 정시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은 종착역에 사람들을 부려놓는 것처럼 유용주는 시인(작가)이 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척박한 길을 달려왔다.

대전은 유용주에게 작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첫 길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작가의 입장에선 ‘내가 2년 5개월 동안 어떤 세월을 견디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전이 시인의 길, 소설가가 되기 위한 한 역이었음은 분명하다.

그의 소설 ‘마린을 찾아서’ 1부의 문을 연 장면도 대전이다. 대전에서 경험했던 청소년기의 삶이 마치 나무 한 그루를 가슴에 심듯, 그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열네 살이 되던 해 1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팔려가다시피 간 곳이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한 중국집이었다. 그곳에서 작가가 보낸 두 달은 2년 아니 20년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직 ‘엄마’라는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야 할 나이인데 보리쌀 두 말에 자신이 팔려왔다고 생각을 했다면 어땠을까.

더욱이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처음의 생각이 단 하루 만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때 찾아오는 마음은 어땠을까. 제발 다시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고 절박한 마음을 실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엔 끝내 답장이 없었다. 아버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내내 어린 용주는 분노하고 슬퍼했으리라.

나중에야 주인아저씨가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를 화롯불에 던졌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을 때 어린 용주의 마음에는 절망감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누나가 용주의 편지를 받고 조성 중국집에 와 용주 손을 잡고 대전으로 올 때까지의 시간은 두려움의 시간이라고밖에 달리 어떤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김희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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