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강진유씨, 고령유씨, 무안유씨
<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강진유씨, 고령유씨, 무안유씨
  • 김진우
  • 승인 2014.09.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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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15) 기계유씨(杞溪兪氏)

<강진유씨(康津兪氏)>
강진유씨는 유적(兪迪)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유적(兪迪)은 강진에 살아온 사족(士族, 문벌이 좋은 집안, 선비의 집안)의 후예로 전하며, 고려 말에 감문위(監門衛, 고려시대 군제인 6위(衛)의 하나로 도성 문을 경비하는 역할을 했다. 궁성 내외의 모든 문을 경비하는 군대로 938년(태조 21년)에 설치됐고 조직은 1령(領, 1령은 1000명으로 구성됐음)의 상장군(上將軍, 중앙군 최고지휘관인 정3품)과 공조판서(工曹判書, 고려 말 6사의 하나인 공조의 정3품 장관)를 역임했다.

강진(康津)은 전남의 남서해안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도강(道康)과 탐진(耽津)의 합명인데, 도강현(道康縣)은 통일신라때 양무군(陽武郡)으로 개칭하고, 고려 때 도강으로 고쳐서 영암에 속하게 했다.
탐진현(耽津縣)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탐진으로 고쳐 양무군에 예속시켰으며, 고려때는 장흥(長興)으로 이속(移屬)시켰다. 1417년(태종17년) 각 병마절도사영(節度使營, 종2품 절도사가 집무하던 곳)을 도강 구치(舊治)에 이설(移設)하고, 양 현을 합쳐 강진군을 설치해 탐진에 치소(治所)를 뒀다.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됐다. 강진유씨(康津兪氏)의 시조 유적(兪迪)은 강진(康津)에 토착한 사족(士族, 문벌이 좋은 집안)의 후예로 전한다.
유적(兪迪)은 고려말에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 감문위는 고려 때 6위의 하나이며 상장군은 정3품)과 판서(정2품 장관)를 역임하고, 강진에 정착 세거해 후손들이 강진(康津)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유적(兪迪)의 아들 유신(兪信)은 조선시대에 부사(府使, 정3품 수령)를 지냈고, 증손 유의정(兪義貞)이 찰방(察訪, 각 역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을 7세손 유성망(兪聖望)이 감찰(監察,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6품)을 역임했다.

강진유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 대과)에 2명, 무과(武科, 무관을 뽑기 위한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명,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1명 등 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강진유씨(康津兪氏)는 1985년에는 3540가구에 1만 5805명이었으며, 2000년 467가구에 1589명이었다.

<고령유씨(高靈兪氏)>
고령유씨(高靈兪氏)의 시조는 유진(兪軫)으로 현감(縣監, 종6품 수령)을 지냈으며, 시조 유진(兪軫)의 선조는 고려때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통례문은 고려 때 조회와 의례를 맡아보던 관아로 1275년에 합문을 고친것, 지후는 ‘삼가 어른을 모시어 시중 듦’ 이란 뜻으로 정7품)를 지낸 유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 유진(兪軫)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고령으로 했다.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대가야국의 중심지로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을 계승해 오다가, 서기 562년(진흥왕 23년) 신라에 병합됐고, 1018년(현종 9년) 영천현으로 개편돼 경산부(京山府. 성주)에 속하게 됐다. 1175년(명종 5년)에 감무(監務, 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뒀다. 1413년(태종13년)에 고양군과 영천현을 고령현으로 병합하고, 1895년(고종32년) 성주군과 현풍군의 일부를 통합한 고령군이 됐다.
인구조사에서 고령유씨(高靈兪氏)는 1985년 1957가구에 8743명, 2000년 238가구에 735명이었다.

<무안유씨(務安兪氏)>
무안유씨(務安兪氏) 시조는 유순직(兪舜稷)이다. 시조 유순직(兪舜稷)은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문관 품계)으로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소부감은 고려 때 궁중의 공예품과 보물의 보관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로 검교는 명예직)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장사(長沙)를 본관으로 했다.

그 후 증손 유천우(兪千遇)가 고려 고종 때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원종 때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고려 때 판사)와 함께 어사대(御史臺)를 이끌던 벼슬로, 995년(성종14년) 국초의 사헌대(司憲臺)를 어사대로 개편하면서 둔 정3품관)를 지낼 때 김인준(金仁俊) 등과 함께 최 씨 무신정권의 최의(崔誼)를 주살(誅殺)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문하성의 종2품 재신)을 지내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정2품 부총리)에 올랐다. 충렬왕때는 찬성사(贊成事, 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역임했다. 그가 죽은 후에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에 추봉됨으로써, 후손들이 이적해 본관을 무안(務安)으로 해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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