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한시감상] 53
- 題紅梅畵簇(제홍매화족) -
夢覺瑤臺踏月華(몽교요대답월화)하니,
香魂脈脈影橫斜(향혼맥맥영횡사)를.
似嫌玉色天然白(사혐옥색천연백)하야
一夜東風染彩霞(일야동풍염채하)를.
- 붉은 매화 족자(簇子)에 쓰다 -
요대(瑤臺)에서 잠을 깨어 달빛을 밟아보니,
향기는 이어지고 그림자는 가로로 기울었네.
천연의 흰 옥빛을 싫어하는 듯하여,
하룻밤 사이 동풍이 붉은 노을로 꽃을 물들였네.

◆지은이 조위(曹偉) : 단종 2년에서 연산군 9년 간에 살았던 학자.
이 작품은 족자 속에 그려진 붉은 매화를 주제로 지은 시이다.
붉은 매화만 있어도 화사한 느낌을 주는데, 옥으로 만든 선인(仙人)의 거처인 ‘요대(瑤臺)’, 눈부신 달빛을 말하는 ‘월화(月華)’, 옥의 빛깔을 말하는 ‘옥색(玉色)’, 아름다운 노을을 말하는 ‘채하(彩霞)’ 등의 시어로 시를 수놓고 있으니, 시가 더욱 화려하고 고결해 보인다.
지은이는 붉은 매화가 탐스럽게 그려진 족자를 보니 시심(詩心)이 발동하여, 붓을 들어 시상(詩想)을 놀려보았다.

제1구에서는 그림 속에서 홍매화(紅梅花)가 피어있는 배경에 대해 읊고 있다. 그림 속에서 신선의 풍모를 한 선인이 자그마한 누각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걸음을 걷고 있었다. 쌀쌀한 밤에 달빛이 부셔진 마당을 밟는 그 모습에는 고상한 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제2구에 와서는 후각(嗅覺)과 시각(視覺)을 통해 감지되는 홍매화에 대해 읊고 있다. 매화는 진한 향기를 연이어 뿜어 선인의 코끝을 자극하고, 가로로 뻗은 가지는 달빛을 받아 그림자를 땅에다 드리우고 있었다. 깊은 밤 오직 선인과 매화가 우주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제3, 4구는 하필이면 흰 매화가 아니라 붉은 매화가 된 이유를, 지은이가 상상력을 구사하여 읊고 있는 것이다. 즉 매화가 붉은 이유는 원래는 흰 매화였는데, 매화 시절에 부는 동풍(東風)이 붉은 저녁 노을을 몰고와 물들였기 때문이라 한다. 참으로 착상이 비범하고, 또 표현이 깔끔하면서도 자연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
이 시는 감상자를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을 가졌다 하겠다.

김기의 [한시감상] 54
- 綾城累囚中(능성누수중) -
誰憐身似傷弓鳥(수련신사상궁조)리오.
自笑心同失馬翁(자소심동실마옹)을
猿鶴正嗔吾不返(원학정진오불반)하니,
豈知難出伏盆中(기지난출복분중)을.
- 능성(綾城) 땅에 갇힌 중에 -
누가 화살 맞은 새 같은 나를 가련히 여겨주랴.
말을 잃은 노인의 심정이기에 홀로 웃어보네.
원숭이와 학이 울어 내가 풀려나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니,
엎어진 동이 속을 못 벗어날 줄 어찌 알았는지.

◆지은이 조광조(趙光祖) : 성종 13년에서 중종 14년 사이의 학자.
이 시는 지은이가 능주(綾州)에 귀양갔을 때의 심경을 읊은 작품이다.
그는 조정에 나아가 중종(中宗)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철저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수구적인 성향을 가진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때마침 왕이 오랜 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를 감지한 훈구대신들, 특히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지은이와 지은이의 동조자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그들은 백성들이 지은이를 왕으로 받들려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궁중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귀를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하여,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란 글이 새겨지게 했다. 즉 지은이의 성인 ‘조(趙)’자를 파자한 ‘走肖(주초)’란 글자에, ‘왕이 된다’는 의미의 ‘위왕(爲王)’자를 보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왕에게 보내고서, 조광조가 나라를 뒤집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자, 임금은 마침내 지은이를 내쳤다. 그래서 지은이는 지금의 전라도 화순군 능주에 유배되었고, 이 때의 심사를 읊은 것이 바로 위의 시인 것이다.

임금의 신임을 얻어 바른 정치를 해보려 했지만, 간신의 모함으로 임금에게 버림을 받아 죽음의 문턱에 서있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이때의 자기 모습을 ‘화살 맞은 새’와 ‘말을 잃어버린 노인’으로 비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은이는 여기서 풀려나지 못할 것임을 짐작했다. 그 상황을 ‘엎어진 동이 속’에 갇힌 걸로 표현을 한 것이다.

이 시는 감상자에게 자신의 좌절감을 동감케 하는 호소력을 가졌다.
그 후 과연 그는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왕명에 의해 죽음을 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해 남긴 시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니, 이렇다. “임금을 부모 사랑하듯 했고(애군여애부), 나라 일을 집안일 걱정하듯 했네. 밝은 태양이 세상을 비쳐주니, 나의 충심을 또렷이 밝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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