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박사·고전번역가

-次沈敎授見贈韻(차심교수견증운)-
君子要須造道深(군자요수조도심)이니,
到收功處始休尋(도수공처시휴심)을.
年來覰破眞消息(연래처파진소식)하니,
自笑從前枉費心(자소종전왕비심)을.

-심교수(次沈敎)가 보여준 시운을 빌려서-
군자는 반드시 도를 깊이 터득해야 하리니,
성공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사색을 멈춰야하리.
근래에 들어 참 소식을 깨치고 보니,
지난날에 괜히 심력(心力)만 낭비한 것이 우습네.

◆지은이 서경덕(徐敬德) : 성종과 명종 사이의 학자.
이 시는 학자의 삶을 산 지은이가 학문의 길에 대해 읊은 작품이다.
지은이는 ‘화담(花潭)’이란 호를 가졌는데, 황진이(黃眞伊)·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세상에 이름이 나있다. 그는 어머니의 명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벼슬을 단념하고, 다만 진리를 캐고 후세들을 교육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현상을 탐구하기를 좋아했었다. 한 번은 나물을 캐러 들판에 나갔다가 막 부화된 새끼 종달새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지은이는 그 새끼 종달새가 나날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느라, 몇 일간을 바구니에 나물을 채우지 못하고 귀가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탐구벽(探究癖)은, 마침내 지은이만의 독특한 철학 세계를 개척하게 했다. 즉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자연철학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 시는 지은이의 학자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물론 지은이는 서경시(敍景詩)나 서정시(敍情詩)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이 시는 그가 가진 이미지에 가장 부합되는 시라 할 것이다.
학자의 탐구는 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는 양파 속처럼 겹겹의 경지가 있다. 만약 작은 깨달음에 만족하게 된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열린 마음과 뜨거운 정열로 정진해나가다 보면,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지난날의 작은 깨침이 유치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근래에 들어 참 소식을 깨치고 보니/ 지난날에 괜히 심력만 낭비한 것이 우습네“라 읊은 것이다.
이 시에는 지은이의 진지한 학문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하겠다.

- 산사에서 오는 길, 옷을 적신 꽃향기

- 示友人(시우인) -
古寺門前又送春(고사문전우송춘)하니,
殘花隨雨點衣頻(잔화수우점의빈)을.
歸來滿袖淸香在(귀래만수청향재)하니,
無數山蜂遠趁人(무수산봉원진인)을.
- 벗에게 보이다 -
오랜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보내니,
지다 남은 꽃이 비를 따라 옷깃을 자꾸 치네.
돌아오는 길 옷소매에 맑은 향기 푹 베었기에,
무수한 벌들이 멀리까지 나를 따라 오네.

◆지은이 임억령(林億齡) : 명종 때의 문신으로서 성품이 강직했다.
이 시는 늦은 봄 산사(山寺)에서 머물다 돌아오면서 지은 시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경지를 읊고 있다.
지은이는 유학자(儒學者)이지만 불가(佛家)와도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삶을 여러 각도에서 통찰하려는 인물로 보인다. 아마도 하나에 걸리지 않는 그였기에 격조 높은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산사를 오가며 보낸 세월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 또 산사에서 봄을 보내게 되었다. 산사에 봄이 오면 온 산이 꽃밭이 되고, 오솔길이 모두 꽃길이 된다. 지금은 가는 봄을 따라 꽃도 지는 계절이니, 때마침 오는 비를 따라 꽃잎이 우수수 옷을 치며 떨어지는 것이다. 그 모습을 “殘花隨雨點衣頻(잔화수우점의빈)”, 즉 “지다 남은 꽃이 비를 따라 옷깃을 자꾸 치네.”라 하여, 꽃과 비와 옷깃이 일체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신묘하게 그려내었다.
그리고 제3, 4구에서는 옷을 두드리며 떨어진 꽃잎 때문에 옷에 꽃향기가 배어들자, 산중의 벌들이 옷에 배인 꽃향기를 따라 멀리까지 따라왔다고 읊고 있는 것이다. 산중의 풍경이 절묘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생동감 있고 창의적이고, 또 아름답게 그려낸 것은 지은이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될까? “지은이의 글 솜씨는 자연이 만물을 만드는 솜씨보다 빼어나다고.”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광경을 기묘하게 드러낸 작품으로서, 어느 한 글자도 빼거나 바꿀 수 없을 만큼 조화를 완벽히 이룬 작품이라 평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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