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문화재단-대전작가회의 공동기획

유림상회에 취직한 진짜 이유는 장사를 배워보라는 유림상회 종업원의 권유였다고 작가는 이야기했다. 부산식당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유림상회에서 받아썼는데 용주는 식당 누나(숙희)와 장을 보러 그곳에 매일 갔다고 한다.

작가는 누나와 함께 있는 것도 부담스럽고 식당 청소만 한다는 것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짠한 마음뿐이었다. 필자 역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느 겨울 먹거리가 떨어져 걱정을 하는 엄마의 넋두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엄마한테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장에 나가 일을 하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요.” 필자의 말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지 말이다.

용주는 유림상회로 옮겨가면서 부산식당에서 손님 자전거로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자전거만 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용주. 보성의 어느 중국집에서도 키가 너무 작아 자전거를 타지 못해서 배달하다 자장면이 불어터져 주인에게 맞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자전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만 배우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아니 이것을 통해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유림상회로 옮겨갔다.

지금 유림상회는 건물만 남아있다. 옛날 유림상회가 있는 골목에는 식료품 가게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대창상회’가 가장 앞에 있었고, 중앙에 ‘유림상회’, 끝에 ‘중앙상회’가 있었는데 지금 유림상회가 있던 건물에는 1층에 옷가게, 2층에는 중앙한의원, 3층에는 한비국제결혼사무실이 들어섰다.

작가는 식료품 가게가 몰려있는 골목인 유림상회 앞에서 그 당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로 취직한 유림상회에선 일이 매우 많았다. 대전 변두리 작은 점방에서 전화 주문이 왔고 금산, 추부, 두계, 신도안, 멀리는 유구에서도 물건을 떼러 왔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품목을 취급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본다면 대형 유통 마트 같은 역할을 유림상회가 한 것 같다. 이런 일터라면 숨쉴 틈 없이 하루가 돌아갔을 것이다.

작가도 인터뷰 도중 그런 말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흥동 주차장에 물건을 싣고 들락거렸다고 말이다. 짐이 많거나 거리가 멀면 함께 일하는 형(복수)이, 거리가 가깝거나 짐이 적으면 작가가 자전거로 배달을 했단다.

유림상회가 있는 식료품 가게는 3층 건물인데 40년 전이라면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점포였다. 그런 점포가 여럿이 모여 있었다고 떠올리니 그 당시 식료품 가게의 전경이 그려졌다.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북적거리고 주문량을 자전거에 싣고 주차장까지 왔다갔다 하다보면 금방 점심시간이 되고, 점심을 먹고 몸을 움직이다보면 해거름이 성큼 다가왔을 것이다. 유용주 작가는 이런 허기를 달래려 잠자리에 들기 전 복수 형과 끓여먹은 라면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 무엇인들 맛이 없었을까. 더욱이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린 몸은 무쇠를 먹어도 목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절 라면을 이렇게 추억하고 있었다. “야참으로 끓인 라면 앞에서 우리 둘은 피어오르는 김처럼 즐거웠다.” 라면 맛이 어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런 포근하고 따뜻한 현실은 금방 달아났다. 밤은 짧고 눈을 감자마자 떠야 하는 일이 매일 반복됐다.

라면 맛처럼 세상도 용주에게 너그럽게 대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용주는 힘든 세상에서도 끝까지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런 용주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함께 일한 복수형이 물건을 빼돌리다 들켜 그만 두게 됐다. 복수 형 몫까지 용주가 맡아 더 바쁘게 더 지친 몸을 이끌고 더 많은 물건을 싣고 더 멀리 배달을 나갔다. 서대전 네거리에서 유성으로, 유성 쪽에서 국군통신부대 정문 근처의 거래처까지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김희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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