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박사·고전번역가

학문의 시작은 의심 …의심을 풀고 또 풀어가는 과정

吟示景范仲明(음시경범중명)-
無疑未必實無疑(무의미필실무의)하니,
字字硏窮句句思(자자연궁구구사)를.
章句未通參或問(장구미통참혹문)이니,
久看氷釋水東之(구간빙석수동지)를.

-읊어서 景范(경범)·仲明(중명)에게 보여주다-
의심됨이 없다 하면 의심을 없애지 못할 것이니,
글자마다 연구하고 구절마다 사색을 해야하리.
장구(章句)로 못 통하면 『혹문』을 참고할 것이니,
오래 보면, 얼음이 풀리듯 물이 동으로 가듯 되리라.

◆지은이 김인후(金麟厚) : 중종 5년에서 명종 15년 사이의 인물.
이 시는 『대학(大學)』이란 경전을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 읊은 작품이다.
우리의 옛 노래 중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부귀의 길을 버리고 산수(山水)를 벗삼아 노니는 심정을 읊은 명작인데, 이 노래의 작자가 누군가 하면 바로 이 시의 지은이 김인후(金麟厚)이다.

지은이는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서 호가 하서(河西)인데, 조선 중기에 성리학(性理學)으로 두각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고향 장성(長城)에 은둔하여 학문 연구와 후세 교육에 전념을 했다. 그는 또한 시를 좋아하여 1600여 수의 작품을 남긴 바 있다.

지은이는 이 시에서 학문의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시작은 의심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의심을 풀고 또 풀어 가는 속에, 문득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의심이 없는 경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의심이 없다고 해버린다면, 참으로 의심이 없는 경지에는 절대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열성을 가지고 글귀의 뜻을 연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대학』을 공부할 때는 주자(朱子)가 만든 장구(章句)를 연구해야 하는데, 이것으로도 통하지 못하면 『대학혹문(大學或問)』을 참고하여 계속 연구하면, 마침내 의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주자(朱子)의 학설을 따르는 사람이므로 『대학』 공부를 주자의 의견을 참조하여 하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학자들을 훈계하는 시이다.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력을 다하여 글귀 속을 파고들어야만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자연과 하나 된 무위의 경지

- 無爲(무위) -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하니,
一身閒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를.
年來漸省經營力(연래점생경영력)하야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를.
- 무위(無爲) -
일정함 없이 변하는 만물처럼
이 몸도 때를 따라 한가로이 노닐도다.
근래엔 세상사 경영할 힘마저 줄어들어
청산(靑山)만 우두커니 바라볼 뿐, 시도 짓지 않네.

◆지은이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22)~1553(명종8) 사이의 학자.
이 시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지은이의 말년 시로 그가 쌓은 수양의 정도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다.
지은이는 호가 회재(晦齋)로 학문에 깊어, 훗날 퇴계(退溪)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젊은 날에는 벼슬길에 나아가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학문의 세계와 고락(苦樂)의 현실을 조화시키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노년에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벗하고 사는 노년의 지은이는 겉으로는 엄연히 성리학자였지만, 내면으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은사(隱士)의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 인위를 앞세우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자연 속에 깃들어 삶을 반추해보게 되면, 천지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몸부림이 얼마나 초라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자연이란 물결은 모든 것을 무심히 변화시키고 지나간다. 뉘라서 여기서 벗어날 것인가. 그래서 지은이는 도가(道家)의 용어인 ‘무위(無爲)’, 즉 ‘억지로 함이 없음’이란 제목의 이 시를 짓게 된 것이다.

천지자연이 걸림 없이 변화하듯, 지은이 또한 저처럼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이 들어보니, 장정처럼 힘있게 일할 수도 없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천지자연의 저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편안한 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노년의 유일한 소일거리인 시 짓는 일조차 이젠 다 잊어버린 것이다. 마침내 지은이는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고, 천지자연은 다시 지은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무얼 할 게 있단 말인가. 무위의 경지에 간 것이다.
이 시는 심원한 수양의 경지를 고아한 언어로 품위 있게 읊었다. 특히 끝 구절의 “청산(靑山)만 우두커니 바라볼 뿐, 시도 짓지 않네.”는 과연 경인구(驚人句)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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