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贈朴思菴淳(증박사암순) -
小屋高懸近紫微(소옥고현근자미)한데,
月邊僧影渡江飛(월변승영도강비)를.
西湖處士來相宿(서호처사래상숙)하니,
東岳白雲沾草衣(동악백운첨초의)를.
- 사암(思菴) 박순(朴淳)에게 주다 -
작은 암자 벼랑 높이 걸려 자미성(紫微星)에 가까운데,
달 곁에는 스님의 그림자 날듯이 배타고 강을 건너네.
서호(西湖)의 처사(處士) 이곳을 찾아 함께 잠을 자니,
동악(東岳)의 흰 구름이 초의(草衣)를 적시네.

◆지은이 이후백(李後白): 1520(중종15)~1578(선조11) 간의 명신(名臣).
이 시는 산중에 머물러 있던 지은이가 박순(朴淳)의 방문을 맞아 지은 시인데, 절창(絶唱)으로 꼽히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신비적인 분위기가 극도에 달해 마치 그림 속의 전경과도 같다. 만약 탐욕스러운 속인을 지은이의 이 시 속에 들어오게 한다면, 하루도 못 버티고 벗어나려 할 만큼 이 시는 너무나 고결하고 고상하다.

제1구에서는 동악(東岳)의 작은 암자가 높은 벼랑 위에 지어져 하늘의 자미성(紫微星)에 가까워졌다고 표현했다. 작은 암자를 뜻하는 ‘소옥(小屋)’, 높이 매달린 것을 뜻하는 ‘고현(高懸)’, 도가적(道家的) 이상 세계를 표하는 ‘자미(紫微)’는 모두 지은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속세와는 전혀 다른 별 세계임을 연상케 한다. 특히 작은 집이 높은 벼랑 위에 매달려있다는 표현은 상응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지은이는 신비의 이 공간을 스님을 등장시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제2구에서 절벽 아래의 강에는 스님이 달빛 속에서 배로 강을 신속히 건너는 모습을 그렸다. 달빛을 받으면서 배를 젓는 스님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시는 고요한 가운데 동적인 분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제3구의 서호(西湖) 처사(處士)는 바로 한강 지역에 사는 박순인데, 바로 이 시의 주인공인 것이다. 제4구에서는 무심(無心)의 흰 구름을 뜻하는 ‘백운(白雲)’과 청렴한 은사의 의복인 ‘초의(草衣)’를 등장시킴으로서, 박순의 인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흰 구름이 초의를 적셨다는 표현은 자연스러움과 신비감을 극도에 이르게 했다.
이 시는 음미하는 자로 하여금 탈속의 세계에 깊이 이르게 한다.

- 陶原卽事(도원즉사) -
靜裏冥觀萬化源(정리명관만화원)하니,
一春生意滿乾坤(일춘생의만건곤)을.
請君莫問囊儲乏(청군막문낭저핍)하라.
山雨終朝長菜根(산우종조장채근)을.
- 도원(陶原)에서의 일을 쓰다 -
고요 속에 뭇 조화의 근원 통찰해보니,
봄이 품은 생명의 의지 천지간에 가득 찼네.
청컨대, 그대는 주머니가 비었음을 근심 마라.
산 비가 아침 내내 내려 풀뿌리 길러 주나니.

◆지은이 조헌(趙憲): 1544(중종39)~1592(선조25) 사이의 학자, 의병장.
이 시는 지은이의 철학적 통찰과 호방한 성정을 엿보게 한다.
금산(錦山) 땅에는 칠백의총(七百義塚)이 있다. 여기는 지은이를 위시한 칠백 명의 의사가 묻혀 있다. 지은이는 호가 중봉(重峰)으로 학문이 깊은 학자였다. 그러나 국난을 당해서는 창칼로써 나라를 지키는 장수였으니, 참으로 나라의 보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지은이는 임진왜란 당시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를 탈환했다. 그리고 금산의 왜적이 장차 충청지역을 석권할 것이란 소식을 듣고, 영규대사(靈圭大師)와 함께 몇 배나 되는 적과 금산에서 싸웠다. 지은이는 화살이 다하여 적이 밀려오자 피하기를 권하니, 웃으면서 “국난에 임해서 구차히 살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독전했다. 그러다 결국 지은이는 함께 참전했던 칠백의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적도 많은 피해를 입어 퇴군함으로써, 마침내 충청 지역은 무사할 수 있었다.

칠백의사(七百義士)의 생사를 초월한 애국심과 의협심은 후인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지은이는 정신을 고요히 하여 천지자연의 소식을 살펴보니, 역시 만물의 탄생은 만물을 낳으려는 봄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짐을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봄이 만물을 살리려 하자, 천지간에는 활기가 도는 것이다. 지은이 또한 새봄을 맞아 설렘을 안고 벗을 찾아갔다.

즐거움이 이미 가득하니, 천지간에 뭐가 부러울 것인가. 비록 주머니가 비었다 한들 의기소침할 것이 없었다. 청빈이 몸에 젖은 선비에겐 봄비에 가득 자란 산나물 뿌리가 고량진미(膏粱珍味)에 못지 않으니.

이 작품은 지은이의 사색적이면서도 낙천적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그 모습과는 상반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출처법(出處法)의 모범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화시에는 학자요, 전시에는 의병이라. <철학박사·고전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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