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柳詩(궁류시)-
宮柳靑靑鶯亂飛(궁류청청앵난비)한데,
滿城桃李媚春暉(만성도리미춘휘)를.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이나,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를.
-궁궐의 버들-
궁궐의 푸른 버들 속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궁성 안에 가득한 도리(桃李)는 봄볕에 아양을 떠네.
조정(朝廷)이 모두 태평시절이라 축하하지만,
누가 날카로운 비판을 선비의 입에서 나오게 했는고.

◆ 지은이 권필(權韠) : 1569(선조2)~1612(광해군4) 때의 시인.
이 시는 왕실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꾸짖는 풍자시(諷刺詩)이다.
제1구에서의 ‘궁류(宮柳)’는 권세를 부리던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 등의 척족을, 꾀꼬리를 뜻하는 ‘앵(鶯)’은 유씨들에게 빌붙는 자들을 말한다. 제2구의 ‘도리(桃李)’, 즉 ‘복사꽃’과 ‘오얏꽃’은 궁중의 모든 아첨배들을 비유한다. 1, 2구에서는 소인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제3구에서는 소인들이 권세를 지키고자 임금에게 태평성대가 왔다고 속이고 있음을 읊었고, 제4구에서는 실제로는 태평성대가 아님을 임숙영(任叔英)이란 선비의 일을 통하여 지적한 것이다. 즉 임숙영은 과거 답안지에다 왕실과 권세가들의 잘못을 신랄히 비판했었다. 지금이 진짜 태평성대라면, 임숙영이 무엇 때문에 그런 글을 썼겠느냐는 것이다.

후에 유희분이 위의 시를 광해군에게 보이자, 광해군은 지은이에게 고문을 가하고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보냈다. 지은이는 고문에 몸이 상해 유배지로 바로 못 가고 벗들과 한양 주변의 민가에서 쉬게 되었다. 그런데 쉬는 방안의 벽에 '푸른 봄날 해는 지려는데(正是靑春日將暮)/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네(桃花亂落如紅雨)/ 권군(權君)이 종일토록 깊이 취하니(權君終日酩酊醉)/ 술이 유령(劉伶)이란 술꾼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하리(酒不到劉伶墳土上)'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은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 속의 글인데, 원작에는 맨 앞의 ‘정(正)’자는 ‘황(況)’자, 제3구의 ‘권(權)’자는 ‘권할 권(勸)’자였다. 문제는 ‘권(權)’자인데, 벽에 쓰인 ‘권(權)’자는 바로 지은이의 성(姓)을 가르치는 글자인 것이다. 결국 죽음의 의미가 담긴 듯한 이 글의 주인공은 바로 권씨 성을 가진 지은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본 사람들이 불안해했는데, 참으로 지은이는 거기서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벽에 쓰인 이 시를 ‘시참(詩讖)’, 즉 ‘예언적 시’라 했다.
지은이의 이 시는 힘이 강했다. 조정을 격동시키고 자기를 죽였다.

자연에 녹아든 한호

-西江(서강)-
千里澄波一鑑光(천리징파일감광)한데,
曲欄徒倚賦滄浪(곡란도의부창랑)을.
嚑葭兩岸西風急(훈가양안서풍급)하니,
無數飛帆亂夕陽(무수비범난석양)을.
-서강(西江)-
천리의 맑은 물결 거울같이 빛나는데,
굽은 난간에 우두커니 기대어 강물을 노래하네.
갈대 무성한 양 언덕에 서풍이 급히 부니,
나는 듯 빠른 무수한 돛단배 석양에 어지럽구나.

◆ 지은이 한호(韓濩): 1543(중종38)~1605(선조38) 간에 생존한 명필.
이 시는 자연 속에 흔적 없이 녹아든 지은이의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자연의 모습을 통해 현실 세계를 비유적으로 읊은 작품이다.
욕심 없는 옛사람들은 자신을 자연과 하나로 여겨 자연 속에 녹아들게 했다. 그리고 일생을 자연 속에 파묻혀,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주린 창자를 달래며 풍광을 즐기면서 학문과 예술 세계에 몰입했다. 그러기에 그들의 학문이나 예술 세계에는 오묘한 자연미가 깃들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세상에서 낮은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편하게 여긴 곳은 바로 자연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지은이는 자연 속에 자신을 녹아들게 할 만큼 순수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기에 오묘한 서법을 세운 천하명필 한석봉(韓石峯)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맑은 강물이 거울처럼 빛났다. 지은이는 이 풍광에 심취하여 넋을 놓고 있다가, 그 푸른 물결을 유연히 노래한 것이다. 지은이가 자연 속에 녹아든 것을 표현한 구절은 바로 제2구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도의(徒倚)’, 즉 ‘우두커니 기대어’라 했는데, 이 말은 ‘자기라는 개체의식을 곧게 세워’와 반대말이 된다. ‘우두커니’는 자기를 잊음이요, ‘기대어’는 자연과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노래하고자 했으니, 지은이는 자연을 넉넉히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가 문득 정신을 되돌려보니, 갈대 무성한 강 언덕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타고 강상(江上)에는 무수한 배들이 어지러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나타낸 것이 제3, 4구인데, 여기서는 현실 세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서풍이 급함을 말하는 ‘서풍급(西風急)’과 배가 석양에 어지러이 다님을 말하는 ‘난석양(亂夕陽)’이, 급박하고 모순 많은 현실 세계를 정확히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고요함과 움직임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침울함도 없고, 또한 위태함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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