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고전번역가

- 漁舟圖(어주도) -
蘆洲風颭雪漫空(노주풍점설만공)한데,
沽酒歸來繫短蓬(고주귀래계단봉)을.
橫笛數聲江月白(횡적수성강월백)한데,
宿鳥飛起渚煙中(숙조비기저연중)을.
- 어주도(漁舟圖) -
갈밭에 바람이 부니 백설이 허공에 흩어지는데,
고기 주고 술 받아와 작은 배를 매어 두었네.
몇 곡조 피리소리에 강 달이 빛을 발하는데,
잠자던 새는 물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네.

◆지은이 고경명(高敬命):1533(중종28)~1592(선조25) 사이의 의병장.
이 시는 고깃배를 중심으로 강상(江上)의 세계를 그린 어주도(漁舟圖)란 그림을 보고 쓴 시이다. 지은이는 그림 속의 전경을 시를 통하여, 감상자들의 시심(詩心) 속에 생동감 있게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호를 제봉(霽峯)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60대의 노인으로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7000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신해 있는 평안도로 북상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왜군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했다.
의기(義氣)가 하늘에 가득하여 생사조차도 뛰어넘은 지은이이지만, 이 시 속에는 시적 흥취를 고조시킬 수 있는 장면을 정확히 포착하고, 또 그것을 조화롭게 살려낼 줄 아는 시인으로서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눈발이 허공에 흩어지면, 누구든 일손을 놓고 한 잔 술로 여가의 낙을 즐겨보고자 한다. 그래서 고기잡이 어부도 술을 사와 배를 강변에 매어두고 눈 오는 겨울날의 운치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제1, 2구에서는 이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청각과 시각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멋이 제3구의 “몇 곡조 피리소리에 강 달이 빛을 발하는데”의 구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청아하게 울리고 있는데, 달빛은 교교히 강상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숨막히는 순간이다. 이때, 잠자든 새도 피리 소리와 달빛에 취하여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이다. 밤이 왔건만 어느 한 곳도 잠든 곳이 없는 것이다.
지은이의 이 시는 강상의 풍광은 물론, 그 속에 흐르는 풍요한 정서들도 한치의 빠뜨림 없이 압축해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장에서 피 흘리고 전사한 의열장부(義烈丈夫)의 솜씨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천연스러움이 서린 수작이라 할 것이다.

- 破鏡(파경) -
睡鴨薰消夜已闌(수압훈소야이란)하니,
夢回虛樓寢屛寒(몽회허루침병한)을.
梅梢殘月娟娟在(매초잔월연연재)하니,
猶作當年破鏡看(유작당년파경간)을.
- 깨어진 거울 -
향로에 불 꺼지고 밤은 깊었는데,
꿈 깬 빈집, 머리맡에 친 병풍엔 냉기만 가득하네.
매화 가지 끝에 걸린 어여쁜 조각달은
마치 아내와 사별할 때 깨어진 반쪽의 거울 같네.

◆지은이 최대립(崔大立):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 호는 창애(蒼崖).
이 시는 깊은 밤에 깨어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작품으로, 경치를 읊은 것 같지만 속에는 그리움의 정이 뼈저리게 서려있다.
잠자는 오리 모양의 향로에 불은 다 꺼지고, 밤은 이미 깊어 천지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이럴 때, 지은이는 문득 잠을 깬 것이다. 한 밤에 잠을 깨게 되면 행복한 사람은 몰라도,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은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 몸을 떨어야 한다. 그들에게서의 밤은 지옥인 것이다.

지은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기에, 슬픔이 가슴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런데 한 밤에 잠을 깨버린 것이다. 집은 텅 빈 것 같고, 머리맡에 쳐놓은 원앙 병풍에는 화기(和氣)가 아닌, 한기만 피어날 뿐이다. 이때 아내가 곁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 이 그리움이여! 마침내 무서운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문을 열고 정원의 매화가지 위를 쳐다보니, 반달이 어여쁘게 떠 있는 것이다. 마치 그 반달은 아내가 죽을 때 쪼개어 간 반쪽의 거울인양 보이는 것이다. 아마 지은이는 넋을 놓고 달을 응시하다가 그 속에 아내의 얼굴이 포개져 보임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달은 달일 뿐 죽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니, 정신을 차리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은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망감을 맛보았으리라.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는 당현종(唐玄宗)이 양귀비(楊貴妃)와 사별한 후 아파하는 심정을 읊은 작품이다. 그 중에 “냉기 서린 원앙 모양의 기와엔 흰 서리 가득한데/ 차가운 비취빛 이불은 뉘와 함께 할꼬/ 아득하여라. 생과 사로 이별한지 몇 년이고 보니/ 혼백조차 꿈속에 찾아들지 않네”라 했다. 그리움을 신묘히 표현했다 할 것이다.
지은이의 이 시를 보면, 지은이의 그리움 또한 당현종에 못지 않고, 지은이의 글 솜씨 또한 백거이에 못지 않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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