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는 백제 근초고왕 5년(351) 낭자곡성(狼子谷城; 狼子城이라고도 함)과 미을성(未乙省)을 쌓은 백제의 땅이었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성(충남 공주)으로 옮기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75년 만인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신라는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지역이다.

그 후 삼국통일 후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넓어진 국토를 종래 상주·하주·신주의 3주 체제에서 9주 5소경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국원소경 이외에 금관경(김해) 등 4소경을 설치했는데, 이때 국원성은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중원이란 삼국이 서로 뺏고 빼앗기던 충주 지역이 한반도의 중앙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삼국의 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충주에는 이곳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며, 세운 높이 14.5m의 7층 석탑이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다. 1992년 마을이름을 따서 중원 탑평리 7층 석탑(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호)이라고 이름 붙여서 국보로 된 탑은 신라시대에 세운 탑 중 가장 높은 탑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유일한 7층탑인데, 중앙탑이라고도 한다. 중앙탑이란 국토의 가장 중심지에 세운 탑이라고 해서 붙인 명칭이다.

 

충주시에서는 일반 사찰의 석탑과 달리 가파른 경사지 위에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같은 모습의 중앙탑과 그 일대에 조각공원을 만들고, 이곳에 충주박물관을 옮기고, 남한강변의 수많은 수석을 모아서 전시한 수석박물관을 세우고, 또 남한강변을 따라 ‘중원문화길’을 만들었다. 금년 2월 1일부터는 중앙탑이 있는 ‘가금면(嘉金面)’을 ‘중앙탑면’으로 개칭하는 등 대대적인 중앙탑 알리기에 나서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가금면’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중앙탑을 찾아가려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중부고속도로 북충주나들목에서 충주까지 왕복 4차선인 520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되고, 남부지방에서는 중부고속도로 음성나들목에서 충주~탄금대~가금으로 가면 된다. 또, 청주에서 충주까지 1시간 20분에 달리는 직행버스가 수시로 있지만, 충주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탄 뒤 약30분정도 가야 한다. 중앙탑공원이나 충주박물관을 입장하는 데는 무료이고, 주차장도 넓다.

중앙탑공원 부근에는 1990년 당시 관할하던 중원군이 관내의 민속자료를 모아서 전시하던 중원문화관이 있었으나,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되면서 충주 시내에 있던 충주시립박물관을 중앙탑 부근으로 옮기면서 중원문화관을 제2충주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시립박물관을 시내가 아닌 중앙탑 옆에 세운 것은 중앙탑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서 본관인 제1관은 역사1·2실과 민속1·2실로 나눠서 불교미술품과 민속품을 전시하고, 약 100m쯤 떨어진 제2관에는 선사 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항쟁실, 충주명현실 4실 등 충주의 역사를 이해 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또, 두 건물 사이의 야외전시장에는 중원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석조유물들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충주시가 국토의 중심지라고 강조하는 좋은 증거가 되는 중앙탑에 대하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 김생이 쌓았다는 설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12년에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탑을 세우고 중앙탑이라고 했다는 설 등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대체로 후자의 설로 굳어지고 있지만, 삼국의 접경지였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과 함께 국토의 중심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면 7층 석탑이 아닌 다른 상징물을 세울 수 있었을 것 같다. 혹시라도 수많은 전쟁 과정에서 죽어간 삼국의 병사들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절터이거나 더 이상 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비보탑(裨補塔)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충주박물관 본관과 야외 전시물

평지보다 한 단계 높이 쌓은 흙더미 위에 세운 중앙탑은 2개의 기단에 7층 석탑을 쌓았는데, 5층까지는 여러 개의 석재로 쌓고 6층부터는 돌 한 개씩으로 세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기단에 비하여 너무 좁게 쌓아올린 탑신이 조금은 허약하게 보이기도 한다. 중앙탑은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에 중앙탑을 전면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이때 기단과 6층 탑신에서 사리 장엄구와 고려시대 거울 등이 발견되어서 건립 이후 복원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해체 복원과정에서의 실수로 상하 각각 10여 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중기단은 각 면마다 3~ 4개의 탱주가 있으나, 그 간격이 고르지 않는 등 원형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조각공원
아무튼 중앙탑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원성왕은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반란을 진압한 김경신(金敬信)인데, 혜공왕이 죽자 김양상은 선덕왕이 되고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두 사람이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찬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선덕왕(재위 780~785)도 재위 5년 만에 후사가 없이 죽자 시중 김경신이 원성왕(재위 785~798)이 되었다. 이때 군신들은 태후의 교지를 받고 시중겸 병부령인 김주원(金周元)을 옹립하고 했으나, 김경신은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넘쳐서 건너오지 못하자 ‘오늘의 폭우는 주원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자신이 궁궐 회의를 거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것도 김경신의 쿠데타로 보고 있다.

한편, 김주원은 김경신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을 두려워하여 어머니 연화부인의 고향인 외가 강원도 명주(지금의 강릉)로 피신하여 살다가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의 사후 둘째아들 김헌창이 822년 무진주(광주)에서 웅진도독(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부임하면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대규모 쿠데타를 일으키자 충주, 청주, 무진주 등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그러나 3년 뒤인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도 한산(지금의 서울)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원성왕은 신라의 왕권세습제를 무너뜨리고 귀족들이 왕권쟁탈을 벌여서 신라 왕권 쇠퇴의 길을 튼 인물인데, 학자들은 김경신은 성골인 내물왕계 12세손이고, 김주원은 진골인 무열계 6세손인 점에서 무열왕 이후 진골이 왕권을 세습하다가 다시 성골이 왕권을 장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앙탑 주변의 넓은 잔디밭을 무대로 하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조각공원은 ‘문화재와 호반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국내의 조각가 작품 26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충주에서는 1992년 중앙탑 주변을 문화사적공원으로 지정했다. 또, 남한강의 풍부한 돌들을 모은 수석박물관도 지척인데, 2012년부터 천혜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중앙탑과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등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을 널리 소개하기 위하여 동량면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에서 중앙탑~ 엄정면 목계나루로 이어지는 총 30km의 강변을 ‘중원문화길’이라는 둘레 길을 조성했다. 중앙탑공원은 중원문화길의 중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중원문화길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남한강의 풍광을 감상하지만, 중앙탑공원에서 역사를 음미하고 조각을 감상하며 남한강의 풍경을 즐기는 사람이 훨씬 많다. 중앙탑과 충주박물관 그리고 조각공원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은 물론 젊은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남한강변 중 가장 멋진 힐링 코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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