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역정이 새겨진 지문-유용주의 삶과 문학⑨
‘중앙극장’ 그리고 ‘대전역에서 새로운 땅 서울로’

폭력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용주는 쉬는 날 영화도 보고 그 또래의 호기심도 가지면서 생활했다. 주로 신도극장이나 중앙극장을 찾아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거나 성인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그 시절 영화관은 지금처럼 흔히 갈 수 있는 문화출구는 아니었다. 유용주 시인(작가)와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중앙극장을 가 보았다. 그곳에 서서 옛날 추억을 돌이키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즐거운 일은 금방 떠오르지만 슬프고 아픈 기억은 스스로 지우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정신과 전문가들을 말한다.

작가는 쉬는 날 동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걸어서 보문산에 가 자전거 사고 난 일을 자랑삼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경호제과에서 기름 때문에 통닭구이가 될 뻔 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잠이 모자란 상태에서 도넛을 만들며 졸다 도넛이 탄다는 소리에 기름을 잘못 건드려 온 몸에 기름이 튄 사건이었다. 그 일로 보름 가까이 누워있었다고 한다. 엄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나이에 혼자 그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니 짠한 마음뿐이었다.

중앙극장은 대전에서 꽤 큰 극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필자는 그 시절에 대전에 없어서 영화관의 규모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변한 크기로 볼 때 결코 작은 극장은 아닐 것 같았다. 유용주 작가로부터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필자 역시 극장은 아니지만 가설극장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100원이 없어서 천막을 치고 상영하는 가설극장에 몰래 들어가다 쥐어 터진 사건을 작가 앞에서 무용담처럼 떠들었다.

두 편 동시 상영은 전국 어느 극장이든 통용되었던 것 같다. 가설극장에서도 두 편 동시 상영을 외치며 홍보 트럭이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그 트럭을 보며 밤을 기다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영화를 보겠다는 일념을 불태우면서 말이다. 작가는 주차장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우리 눈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중앙극장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을 것이다. 작가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상상이 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곳도 사람과 이별을 하는 곳도 역이다. 역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유용주 작가에게도 역은 그런 곳이다. 서대전역에 첫 발을 딛었을 때 조성(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왔다. 어떻게든 조성의 중국집(명월각)만 빠져나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누나의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와 서대전역에 내린 후 2년이 넘는 시간을 대전에서 보냈다. 대전에는 두 역이 있다 경부선으로 가는 대전역, 호남선으로 가는 서대전역이다. 두 역은 두 지역에서 올라와서 서울을 가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역이다. 역은 우리네 아버지 엄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의 애환을 기억하고 있다.

대전의 두 역 역시 작가 유용주를 기억하고 있다. 작가가 처음 상처를 가지고 내린 서대전역은 그 상처의 기억이 서서히 지워졌다 해도 여전히 어린 용주를 기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없다. 역이니까 말이다. 다시 또 다른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용주는 대전역을 찾는다. 아무도 모르게 밤이슬을 밟으며 밤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가기 위해서.

경호제과에서 폭력을 이겨내고 제법 기술자 대우를 받으며 살던 어느 날 용주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서울에 가면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세상 그 무엇보다 유혹적인 내용의 편지였다. 작은 형 친구한테 온 이 편지는 유용주 작가가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을 하는 계단이 되기도 한다. 가리봉동인가 구로동인가에서 사출공장을 다니는 작은 형을 만나 빵공장의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그걸 잊지 않았던 작은 형이 친구에게 용주의 사정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작은 형 친구가 용주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김희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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