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고전번역가

-湖行絶句(호행절구)-
湖西踏盡向秦關(호서답진향진관)하니,
長路行行不暫閑(장로행행부잠한)을.
驢背睡餘開眼見(여배수여개안견)하니,
暮雲殘雪是何山(모운잔설시하산)고.
-호서(湖西)를 여행하며-
호서(湖西)를 두루 밟아 경기 땅을 향하니,
긴 여로(旅路)를 가고 또 가 잠시도 한가치 않았네.
나귀등에서 졸다가 얼른 눈을 떠보니,
저문 구름과 잔설(殘雪) 서린 이 산은 어느 산인고.

◆지은이 김득신(金得臣):1604(선조37)~1684(숙종10) 년 간의 시인.
이 시는 지은이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일을 재치 있고 실감나게 읊은 작품이다.
이 시의 지은이는 호가 백곡(栢谷)으로 시로써 당세(當世)를 울린 명 시인이다. 그가 한 번은 호서(湖西)의 충청도 땅을 두루 다니며 여행을 하다가 진관(秦關)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관은 원래 중국의 관중(關中) 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경기도 지방을 이르는 말이다.
요즈음이야 승용차를 타고 먼 길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다닐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옛 시절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귀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걷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길은 더디고 몸은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긴 여정 끝에 나귀등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이다. 아마 지은이는 나귀가 길을 잘 찾아 갈 것으로 믿고 있었으리라.

물론 정처 없이 떠나는 낭만파 유람객들은 말이 가는 데로 따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경기도 땅이란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잠시 조는 사이 지은이의 나귀는 주인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제 마음 데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졸음에서 막 깨어나 퍼뜩 눈을 떠보니, 저문 구름과 잔설(殘雪) 서린 처음 보는 산 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막 잠에서 깨어난 뒤라 지은이는 이 낯선 전경 앞에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저문 구름’과 ‘잔설’이란 시어를 사용함으로써, 낯설음과 서글픔의 감정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으며, ‘이 산은 어느 산인고.(是何山)’라는 구절에서 황당해하는 심정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일 순간의 사태를 생동감 있게 드러낸 수작이라 하겠다.

노년에 금강산 찾은 우암 송시열

-遊金剛山(유금강산)-
一萬奇峰又二千(일만기봉우이천)한데
海雲飛盡玉嬋娟(해운비진옥선연)을.
少時多病今來老(소시다병금래노)하야
孤負名山此百年(고부명산차백년)을.

-금강산을 유람하다-
일만의 기이한 봉우리에 또 이천이 더 있는데,
바다 구름 다 걷히니 봉우리가 옥처럼 곱구나.
젊을 땐 병 많아 못 왔다가 늙고서야 찾았으니,
홀로만 명산을 등진지 백년이 다 되어가네.

◆지은이 송시열(宋時烈) : 1607(선조40)~1689(숙종15) 사이의 학자.
이 시는 지은이가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 보내고 노년에서야 뒤늦게 금강산을 찾아든 아쉬움을 읊고 있는 작품이다.
지은이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두로서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귀양과 복직을 되풀이 하다가, 최후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등용되었으나, 금강산을 유람한 후 사표를 내고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현실 참여 의식이 강한 그가 금강산을 다녀온 후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 신묘기이(神妙奇異)한 금강산의 장관을 보고 인간세상의 삶이 한없이 속되어 보여서가 아닐까.
이 시는 금강산의 경치를 그려내고자 했다기보다는, 늦은 나이에 금강산을 처음 대하게 된 감회를 읊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을 그려낸 부분은 제1, 2구인데, 이 구절은 너무나 평범한 내용이니, 어찌 이로써 그 장엄한 금강산을 다 표현했다 하겠는가.

지은이가 금강산의 모습을 마음먹고 그려낸 작품은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금강산」시 일 것이다. 즉 “구름과 산이 다 희니(雲與山俱白), 구름과 산의 모습 분간할 수 없구나(雲山不辨容). 구름이 다 가고 산만 홀로 서 있으니(雲歸山獨立), 아하! 일만 이천봉(一萬二千峰).” 이 시인들 어찌 금강산을 다 담았다 할까 만은, 지은이는 때 마침 비장해 두었던 금강산의 전모를 산신령(山神靈)이 조화를 부려 보여 주었기에, 그 순간의 장엄한 경관을 군더더기 없이 잘 포착해내었다. 물론 이 시를 짓는 지은이의 의식 속엔, 구름이 다 사라지자 마침내 일만 이천봉이 다 보이게 되듯이, 자신이 믿고 있는 ‘대의(大義)’는 그 어떤 것에도 결코 파묻히지 않는다는 신념도 깔려있으리라.

금강산은 벼슬을 버리게 할 만큼 지은이에게는 의미 있는 산이다. 그래서 금강산에서 지은 그의 시 두 수에는 각각 뒤늦게 찾은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진하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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