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이현동 두메마을 → 대전 직동 냉천버스종점 (10㎞ / 4시간 40분)

두메마을→ 찬샘마을→ 부수동→ 대청호전망좋은곳→ 성치산성→ 찬샘정→ 냉천

 

백제의 후예로서 대청호반을 걷는다는 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패망의 역사가 땅 속에 묻힌 곳이라 더욱 그렇다. 아름다운 풍경이야 이루 말 할 나위 없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아픈 과거는 환희와 절망의 복잡한 교차점을 만들어 낸다. 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이 특히 그렇다. 대청호반의 아름다운 일출 명소 중 하나로 꼽히는 장소가 바로 백제의 가장 비참한 최후가 있었던 바로 그 곳이다. 

백제의 눈물,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2구간
오늘 따라 하늘마저 어둡고 무겁습니다
새벽길 나선 일행에게
자연은 일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장쾌해야할 조망도 모습을 감췄지만
맑은 날엔 볼 수 없는
흐린 날의 무릉도원을 만납니다
함께 가는 길은 늘 아름답습니다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지치면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어둑어둑한 대청호반에서
흐린 날의 보석을 얻습니다

 

◆ 길을 나서는 순간 문득

700년 백제의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은 6세기 중엽이 아니었나 싶다. 고구려에 밀려 백제의 발상지인 한강유역을 내준 뒤 설욕을 준비했던 때다. 그 중심엔 백제 성왕이 있었다. 사비(충남 부여) 천도로 힘을 키운 뒤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백제를 성장시켜 끝내 한강유역을 되찾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백제의 왕으로 기록된다.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에서 비롯된 어처구니없는 사건 때문이었다. 백제 중흥의 기치를 바로세운 위대한 왕이 노비의 칼끝에 운명하고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채, 죽어서도 신라 궁궐의 계단 아래에 묻히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 역사서에 기록된 이 미스터리한 역사적 순간의 주요 배경이 바로 대청호반이다.

 

 

◆ 슬프도록 아름다운

백제의 아픔, 그 무거운 마음을 안고 새벽길을 나선다. 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의 시작은 이현동 두메마을이지만 2구간 날머리와 가까운 노고산 일출의 감동을 느껴보기로 했다. 해 뜨는 시간은 7시 40분경. 행여 늦지는 않을까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찬샘정에 차를 대고 산을 오른다.

노고산 해돋이 전망대 고도는 250m,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 산행이어서 조심스럽다. 손전등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계속 오르막을 탄다. “꼬끼오∼.”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 아주 고요하다. 2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여전히 어둠 속이다. 이제 떠오르는 붉은 태양만 기다리면 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날씨가 도와주질 않는다. 구름 사이로라도 보여주길 간절히 원했지만 붉은 태양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제의 아픔, 그 우울한 마음을 하늘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노고산에서 바라보는 대청호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여명(黎明)의 순간, 신비의 안개구름 물결이 서서히 걷히고 대청호반의 윤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은 섬이 되고 구름은 호수가 된다. 첩첩산중 그 사이로 고요한 대청호가 깨어난다. 그리고 그 호수는 이내 산 아니 섬을 담는다. 대청호를 가리켜 ‘다도해를 내륙에 옮겨놓았다’는 찬사가 나오는 이유다.

노고산 해맞이 전망대에서 조금만 더 가면 노고산성 성벽 일부를 만날 수 있다. 무너져 내린 돌덩어리들이 백제의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해 준다. 전망대에서 노고산성 잔해가 남아 있는 유적으로 가는 중간에 할미바위가 있다. 그래서 산성 이름이 노고(老姑)산성이다.

 

노고산성이 있는 곳은 예전엔 피골로 불렸다.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군사들의 피가 이곳 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정도였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후 일제시대, 동 이름을 지으면서 ‘기장 직, 피 직(稷)’자를 가져다 직동이라 했다. 예전의 피골은 현재 찬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체험마을 중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 출발

◆ 어느 흐린 날 추억 한 조각

1구간의 종점, 2구간의 시작점인 이현동 두메마을에 다시 섰다. 날씨가 흐려 맑고 경쾌한 수채화로 대청호반을 감상할 순 없지만 은은한 수묵화로 보여지는 대청호반도 나름 운치가 있다. 섬과 호수의 실루엣만으로도 대청호 오백리길은 기쁨을 선사한다.

억새밭길을 따라 찬샘마을로 가는 길. 몇 걸음 안 가서 [수위가 높아져 찬샘마을 징검다리 끊겼음. 우회 바람]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돌아가면 대청호반을 가까이서 느낄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직진. 이제부턴 트레킹이 아니라 액션 어드벤처다.

 

 

역시 무모한 도전이었나? 배가 없으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 그래도 이제 와서 유턴을 결정할 수도 없다. 길이 없으면 만들자. 호수와 접한 산기슭을 따라 가 본다. 물길이 좁아지는 시점, 누군가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안도의 한 숨을 내 쉰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또 다시 하천이 흐른다.

 

◆ 신비의 무릉도원을 만나다

성치산성으로 가는 길, 잠시 쉬어갈 장소가 있다. 부수동 '대청호 전망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이다. 200m 정도 호숫가로 더 들어가면 탁 트인 호수와 바로 접한 쉼터가 있다.

흐린 날 이곳은 무릉도원의 모습을 드러낸다. 안개가 신비로움을 연출하고 촉촉한 빗방울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섬과 호수의 향연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다소 몽환적인, 그러면서도 마음의 치유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노고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장쾌한 대청호반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멋이 이곳에 있다. 2구간 전체 여정에 있어서도 이곳은 훌륭한 쉼표 역할을 한다.

몸과 마음, 특히 눈이 호강을 했다면 이제 다시 가쁜 숨을 몰아쉴 채비를 해야 한다. 이제 성치산성에 오른다. 찬샘정에서 노고산성 오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경사가 가파르다. 종아리 근육이 당길 정도다. 쉬엄쉬엄 20여 분을 올라 성치산성에 다다른다. 이곳도 역시 산성 성곽 일부만 남아 있다.

정상에 서면 청남대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다. 보슬비가 갑자기 싸락눈으로 바뀐다. 낙엽이 싸락눈 머금는 소리가 경쾌하다. 성치산성에서 곧바로 내려와 다시 호반길을 만난다. 망향의 슬픔이 서린 찬샘정.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눈에 들어오는 첩첩산중의 깊이도 더해간다. 백제의 한(恨)에 망향의 슬픔까지, 2구간은 애잔한 사색의 기회를 준다. 물론 맑은 날이라면 이 모든 것은 환상적인 풍경에 묻히겠지만.

무릉도원 감상의 막바지,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비가 세워진 찬샘정에서 2구간을 서서히 정리한다. 선명한 수채화의 느낌이 아니라 아련한 수묵화의 느낌이 대청호 오백리길에 대한 색다른 맛을 준 여정이었다. 2구간의 종점인 냉천 버스종점에 이르는 약 1㎞ 구간, 대청호반은 변함없이 긴 세월의 흔적을 품고 고요함과 평온을 선사한다. 한 가지 팁, 2구간을 걷다 근사하게 조성된 묘지를 발견하거든 그 묘지가 지긋이 응시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라. 그곳이 바로 대청호반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포토존이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이승훈 기자

 

#. 노고산성, 백제의 아픔     

 - 대전 직동이 '피골'인 까닭 

1460년 전, 훗날 백제의 운명을 가른 중대 사건이 이곳 대청호 인근에서 발생했다. 바로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전투다. 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추정되는 관산성은 백제와 신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여서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펼쳐야만 했다.

대청호 주변에 ‘피’와 관련한 지명이 많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제·신라군의 피가 모여 큰 강을 이뤘다’는 말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한반도의 삼국지는 5·6세기가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각 스캔들'이 결정에 달했던 때다. 4세기는 적어도 백제가 중원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근초고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면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는 지금의 평양까지 진군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391년,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고구려의 왕이 되면서 한반도 힘의 균형은 다시 요동친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면전이 불가피한 상황. 두 나라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백제는 근거지였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게 된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장수왕 때의 일이다.

이후 백제는 웅진·사비천도를 통해 전열을 정비한 뒤 신라와 함께 고토 회복에 나선다. 그 중심에 백제 성왕이 있었다. 성왕은 사비(충남 부여) 천도 이후 나라가 안정되자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백제의 태자 여창(餘昌·위덕왕)을 앞세워 고구려의 성문을 두드렸고 551년 결국 한강유역을 되찾으면서 다시 한반도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553년, 백제의 역사에 있어 가장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가 기록된다. 바로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이었다. 고구려의 예봉을 꺾는 데 힘을 소진한 백제는 신라의 금강유역 가로채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백제는 창끝을 신라에 겨누고 경주를 향해 진격한다. 이번에도 선봉은 여창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금의 대청호 인근이 피바다를 이루는 시발점이다.

승리의 여신은 백제의 편이었다. 일본과 가야의 지원까지 등에 업고 도발을 감행한 신라를 응징했다. 신라 진격의 관문이었던 관산성을 접수했던 터였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은 신라의 편이었다. 여창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신라 응징에 밤잠을 설친다는 말을 전해들은 성왕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병 50여 기만 거느리고 여창이 있는 전선으로 길을 나섰다가 야심한 밤에 한강유역에서 긴급 투입되던 신라 김무력(김유신의 조부) 부대의 매복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성왕이 전시에 단출하게 몇몇 병사만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는 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지만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 중요한 순간에, 왜 그런 무모한 일을 감행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전세는 급격히 신라 쪽으로 기울었다. 고군분투하던 여창도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강경했던 신라 응징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대전지역에선 약 50여 개의 산성이 발견됐는데 이 중 절반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상, 대청호반에 위치해 있다.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만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에 자리한 피골 노고산성도 그 중 하나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계족산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 2구간 경로 ( 경로 기록 중 오류로 인해 절반..밖에 기록 못했습니다 ㅠㅠ) 

이현동 두메마을~찬샘마을~부수동~대청호전망좋은곳까지의 기록입니다. 조만간 2구간 모든 코스 기록으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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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5. 17구간 (사향길) : 물결, 그 눈물
6. 13구간 (한반도길) : 반전을 꿈꾸는가
7. 4구간 (호반낭만길) : 대청호길 대표주자
8.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 : 대전, 다도해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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