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東遊雜興(동유잡흥) -
碧水成潭盡日閒(벽수성담진일한)한데,
奔流何事到人間(분류하사도인간)고.
桃源未必無尋處(도원미필무심처)인데,
爭奈漁郞半道還(쟁내어랑반도환)을.
- 동쪽 유람에서 얻은 흥취 -
초록빛 물이 못을 이루어 종일토록 한가한데,
무엇 때문에 인간 세계로 달려가려 하는고.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찾지 못할 곳도 아닌데,
어이하여 어부는 중도(中途)에 돌아왔는가.

◆지은이 홍석주(洪奭周) : 1774(영조50)~1842(헌종8)년 간의 문신.
이 시는 동쪽 유람에서 만난 경관의 빼어남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고사를 빌어 드러낸 작품이다.
‘벽수(碧水)’는 그 뜻이 ‘초록빛 물’ 또는 ‘푸른 물’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어떤 말로도 다 해석할 수 없는 시어이다. 이 시어를 사용하지 않은 시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벽수’는 반복적으로 쓰인 덕분에 이제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바로 초록·투명·맑음·신비·시원함 등의 이미지를 다 함축하고 있는 살아있는 물체가 된 것이다.

지은이는 고요히 그쳐있는 못물을 보았다. 그 물을 지은이는 ‘벽수’라 했다. 지은이는 바로 여기가 무릉도원이라 여겨질 만큼 신비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런데 벽수가 담긴 못의 낮은 곳에선, 한줄기 물이 졸졸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으로 흘러가는 그 물을 가만히 보다가 지은이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생각났던 것이다.

진(晋)나라 때 무릉 땅의 어부가 도화가 떠내려오는 냇물을 그슬러 올라가다가 한 동굴을 지나자, 그곳엔 세상과는 다른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니, 그들은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미 세월은 수 백년이 흘렀음에도, 그들은 지금도 진시황 때인 줄 알았다. 어부는 평화로운 전경에다, 이 세상과 그곳의 시간대가 상이함을 기묘히 여겼다. 어부는 일단 거기서 되돌아왔는데, 나중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곳을 못 찾고 돌아오고 말았다. 이상이 『도화원기』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지은이는 자기가 본 이곳이 무릉도원과 다름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릉의 어부처럼 부질없이 무릉도원을 다시 찾으려 헤매다가 되돌아올 게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시는 지은이의 벽수에 대한 신성한 느낌을 도원(桃源)의 고사를 통해 절묘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다.

 

황제의 관직 유혹 뿌리친 엄자릉의 삶

- 釣臺懷古(조대회고) -
七里灘頭舊釣臺(칠리탄두구조대)에
蒼苔錦石淨無埃(창태금석정무애)를.
秪今不見羊裘客(지금불견양구객)하고
沙上惟餘白鳥來(사상유여백조래)를.

- 조대(釣臺)에서의 회고 -
칠 리의 여울 머리 옛 낚시터에
푸른 이끼 낀 비단 같은 바위엔 먼지 한 점 없네.
지금엔 양가죽 옷 걸친 낚시꾼은 보이지 않고
오직 모래 위엔 백구(白鷗)만 남아 오갈 뿐….

◆지은이 김시태(金時泰) : 정조(正祖) 무렵의 인물.
이 시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인물인 엄자릉(嚴子陵)이 낚시하던 곳을 둘러보고 지은 전형적인 회고시(懷古詩)이다.
엄자릉은 소시 적에 유문숙(劉文叔)과 함께 공부를 했다. 나중에 유문숙이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이다. 한편 엄자릉은 친구였던 유문숙이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런데 황제는 마침 강직했던 옛친구 엄자릉이 생각났다. 그래서 초상화를 배포하고 상금을 걸어 엄자릉을 찾게 했다. 한참 뒤에 제(齊) 땅에서 초상화와 닮은 사람이 양가죽 옷을 입고 낚시하는 자가 있다하기에 그를 불러오게 하니, 과연 그는 황제가 찾던 엄자릉이었다.

황제는 일개 낚시꾼인 엄자릉과 몇 일간 함께 기거하면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하는 등의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그러나 엄자릉은 부귀의 길을 마다하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낚시와 농사로 일생을 마쳤다. 엄자릉은 황제의 위엄과 관직의 유혹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뜻에 맞는 삶을 고수했으니, ‘만고의 고사(高士)’라 할만하다.

후세의 어떤 시인이 엄자릉의 심정을 읊기를, “만사에 마음 없고 낚싯대 하나만 잡을 뿐(萬事無心一釣竿)/ 삼공(三公)의 작록도 이 강산과 바꾸지 않으리(三公不換此江山)/ 평생의 한은 오직 유문숙을 알았음이니(平生恨識劉文叔)/ 헛된 이름만 세상에 가득 차게 했네(惹得虛名滿世間).”

지은이 또한 이런 고사가 서린 곳에 가서 한 수의 시를 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릉탄(嚴陵灘)’이라 불려지는 여울 가에 깨끗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엄자릉의 낚시터였던 것이다. 황제의 위엄도 삼공의 작록도 초개같이 보았던 그 엄자릉의 자태는 간 곳 없고, 지금의 부춘산 속의 낚시터엔 오직 백구만 그전처럼 오갈 뿐인 것이다.
이 시는 부춘산 조대에서 엄자릉의 행적을 추상(追想)하다가, 결구에서 갈매기를 등장시켜 엄자릉의 고결한 지조를 연상케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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