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의 [한시감상] 100 - 大風(대풍) -
獨夜殘燈坐讀書(독야잔등좌독서)한데,
寒聲忽起打窓虛(한성홀기타창허)를.
飛廉何事欺吾老(비렴하사기오노)요.
偏入窮村捲草廬(편입궁촌권초려)를.
- 큰 바람 -
외로운 밤 희미한 등불 앞에 앉아 독서를 하는데,
차가운 소리 홀연히 일어나 빈 창을 때리는 구나.
바람 신(神)은 무슨 일로 늙은이를 놀리는가.
하필이면 궁촌(窮村)에 들어와 초가집을 휘감는고.

◆지은이 강후석(姜後奭) : 정조(正祖) 년 간의 인물.
이 시는 태풍을 맞이하는 산골 선비의 근심스런 심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해낸 작품이다.
큰바람을 ‘태풍’이라 하는데, 태풍은 장마철이나 추석 전후 또는 한겨울에 주로 불어온다. 특히 태풍이 비까지 몰고 올 때는 인간 세상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그만큼 태풍의 위력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마다 취미는 다르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고요한 밤 산골에서 독서하는 것이 천하제일의 맛일 게다. 지은이는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독락(獨樂)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장의 큰바람이 창문을 때리니, 정신이 현실 속으로 번쩍 회귀하게 된 것이다.

부드러운 바람이야 독서의 운치를 더해주겠지만, 지금 창을 치는 저 바람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바람인 것이다. 그래서 노 선비는 바람의 신(神)인 비렴(飛廉)을 원망하는 것이다. 우주는 광활하기 그지없고, 지구는 또 그 크기가 얼마이던가. 더욱이 팔도 조선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와 들판, 그리고 마을과 물이 있다. 그런데 바람 신은 하필이면 궁벽한 촌락에, 그것도 풀로 지은 오두막이라 언제 날아 가버릴지 모를 지은이의 집에만 바람을 불어보내는가. 지은이는 그것이 야속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필이면 궁촌(窮村)에 들어와 초가집을 휘감는고(偏入窮村捲草廬)”라고 바람 신에게 투정을 부려보는 것이다.
이 시는 고요함과 움직임을 적절히 배합시켜 시에 생기가 넘치게 하는 한편, ‘비렴’이란 상상의 존재를 등장시켜 궁벽한 처지를 추하지 않게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다.

 

큰비 내린 어느 시골 쓸쓸한 저녁연기

김기의 [한시감상] 101 - 晩村雨後(만촌우후) -
平原漠漠雨初過(평원막막우초과)하니,
十里靑山一帶霞(십리청산일대하)를.
斜日斷橋人去盡(사일단교인거진)한데,
孤煙寥落兩三家(고연요락양삼가)를.

- 비 온 뒤의 저문 마을 -
들판 가득히 비가 막 지나고 나니,
십리 청산(靑山)엔 한 무더기 노을이 감쌌네.
석양녘 끊어진 다리엔 인적을 볼 수 없는데,
외로운 연기만 쓸쓸히 두어 세 집에 피어나네.

◆지은이 이군석(李君錫) : 정조(正祖) 시절의 인물.
이 시는 큰비가 지난 뒤의 시골 풍경을 자신의 감정을 은밀히 가미시켜 읊어낸 서경시(敍景詩)이다.
비․바람․눈․구름․서리․이슬 등은 자연현상이 빗어낸 결과물이다. 이 중에 비는 만물을 적셔주고 씻어주는 자양분임과 동시에 청소부의 역할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비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 숨을 쉬기도 하며, 또 파전에 동동주 한잔을 떠올리기도 한다. 비는 유익하고 인간의 감정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처럼 고마운 비이지만 너무 많이 오게 되면, 이때는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너무 많이 오는 비를 ‘폭우’라 하는데, 폭우가 내리는 날엔 천지가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만다. 고마운 것이지만, 중용을 벗어나게 될 때는, 무서운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의 이 시는 아마도 폭우가 지난 뒤에 지은 시 같다. 폭우가 지나고 나면, 두 가지 경치가 펼쳐진다. 하나는 하늘은 맑아지고 산에는 안개와 노을이 감싸는 멋진 풍광이요, 또 하나는 세찬 비바람에 건축물이 부셔지는 참담한 광경이다. 극락과 지옥이 함께 열리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가 제1, 2구에서는 비 온 뒤의 한가한 풍광을, 제3, 4구에서는 석양녘에 끊어진 다리와 쓸쓸한 저녁 연기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는 폭우가 지난 뒤에 읊은 시임이 분명한 것이다.

지은이의 이 시는 비 온 뒤의 상황을 조리 있게 차분히 읊은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선 ‘고연(孤煙)’, 즉 ‘외로운 연기’란 시어를 통하여 지은이가 느끼는 감정을 은근히 섞어 재치 있게 읊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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