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힘으로 핀 꽃이 뿌리가 깊다

<如說1> 도덕적으로 얻은 부귀명예, 그 생명이 길다.같은 부귀명예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얻었느냐에 따라 생명이 길고 짧음의 차이가 크다 하겠다. ‘채근담’에 이를 꽃에 비유하여 잘 묘사하였다.

○그 하나는, 도덕적으로 얻은 부귀명예이다. 채근담에서는 이것을 ‘산림중화’(山林中花) 즉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꽃에 비유했다. 산과 들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피어난 꽃은 뿌리가 깊고 튼튼하여 수명이 오래간다. 이처럼 도덕적이고 정당하게 얻은 부귀명예의 생명은 길어서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공직자로서 능력과 도덕적 정당성을 갖추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권력의 부침(浮沈)에 휩쓸리지 않고,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소신껏 일해 온 그 공직자의 업적이나 명예는 오래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공직사회에는 지위가 높은 고위 공직자 일수록 이러한 공직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하나는, 공적(功績)을 이루어 갑자기 얻은 부귀명예이다. 이것을 채근담에서는, 분함중화(盆檻中花) 즉 화분에 심은 꽃에 비유했다. 인공으로 화분에 심은 꽃은 뿌리가 깊지 못하고 약하며, 자주 옮겨서 심게 되므로 수명 또한 믿을 것이 못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공적이나 정치세력에 의해 갑자기 얻어진 부귀명예는 공적이나 정치세력에 의해 그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한시적이다.

공적이 이루어지거나 정치세력이 소멸되면 부귀명예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 속 수많은 개국공신들은 주군(主君)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나라를 세웠다. 그들은 그 보답으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왕이 된 주군은 자기 세력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개국공신들을 제거한다. 이것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이처럼 역사 속 많은 개국공신들 중에는 개국공신으로서의 부귀영화를 끝까지 누리지 못하고 토사구팽으로 비명횡사한 공신들이 많다. 이러한 것이 공적(功績)을 이루어 갑자기 얻은 부귀명예로서 한시적(限時的)부귀명예가 된 것이라 하겠다.

어느 정권이나 5공 실세니 6공 실세니 하는 것처럼 실세(實勢)가 되는 정치세력이 있다. 이들은 실세로서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누린다.그런데 정치세력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진다. 그러한 고로 정치세력에 의해 얻어진 부귀명예 또한 화분에 옮겨 심은 꽃처럼 이리저리 옮겨지기 때문에 그 생명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의탁해서 얻은 부귀명예이다. 채근담에서는 이것을 병발중화(甁鉢中花) 즉 ‘꽃병속의 꽃’에 비유했다. 잠시 보려고 꽃병에 꺾어다 꽂는 꽃은 뿌리가 없어 곧바로 시든다.

권력에 아부하거나 반도덕적으로 얻은 부귀명예는 도덕적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뿌리 없는 꽃병속의 꽃처럼 얼마 안가서 없어지고 만다. 유신정권 시절 많은 학자나 지식인들이 유신정권에 의탁하여 유신의 파수꾼 노릇을 하는 어용학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 대가로 부귀명예를 얻었으나 유신정권이 망하자 그들도 어용학자라는 지탄을 받으며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하였다. 바로 권력에 아부하여 얻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부귀명예이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권력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기업가는 기업을 위한 경영을 해야

<如說2> 기업을 위한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기업가가 기업(企業)을 위한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정도(正道)로서 그 기업을 운영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산림지화(山林之花)처럼 기업 스스로의 뿌리가 튼튼하여 생명력이 길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가 개인의 사욕(私慾)을 위한 기업을 운영할 때 그 기업은 분함중화(盆檻中花)나 병발중화(甁鉢中花)처럼 생명력을 잃고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이다. 특히 기업가 자신의 사욕(私慾)을 위해 기업을 정치에 이용하거나 기업을 권력에 의탁시켜 운영하려는 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 하겠다. 지난번 ‘동국철강’사태나 지금의 ‘경남기업’사태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얻고 있는 것이다.

<如說3.> 도덕적으로 얻은 부귀명예, 지키기가 더 어렵다. 미귀삼척토(未歸三尺土) 난보백년신(難保百年身) 이귀삼척토(已歸三尺土) 난보백년분(難保百年墳)이라 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一身(일신)을 명예롭게 보전하기가 어렵고 죽어서도 후세에 영원히 그 명예를 보전하기 어렵다.’ 하였다. ▲그렇다. 정도(正道)에 어긋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며 사는 하루의 삶이 명예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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