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중수사(病中愁思) -
空閨養拙病餘身(공규양졸병여신)하니,
長任飢寒四十春(장임기한사십춘)을.
借問人生能幾許(차문인생능기허)
胸懷無日不沾巾(흉회무일불첨건)을
- 병중의 시름 -
독수공방에 병을 다스리는 이 몸.
돌아보니, 기한(飢寒)을 견딘 지 사십 년이 되었구나,
묻건대 인생살이는 그 얼마이던가.
서글픈 심정에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네.

◆지은이 매창(梅窓): 1573(선조6)~1610(광해2) 년 간의 기녀(妓女).
이 시는 기생(妓生)의 신분을 가진 지은이가 시들어 가는 자신의 인생을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지은이는 조선 중기에 부안(扶安) 땅의 기생으로 시를 잘 했다. 그래서 『매창집(梅窓集)』이란 시집을 남기기도 했다. 흔히들 ‘기생’이라 하면 화려하고 또 멋스러운 존재로 인식을 한다. 그래서 ‘해어화(解語花)’, 즉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란 별명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기생들의 뒤안길 삶을 보지 못했을 때 하는 소리이다. 어여쁜 나이에 몸도 건강하고 찾는 이도 많은 시절엔,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그야말로 만인의 꽃인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것만큼 지고 나면 처참한 게 바로 꽃이다. 나이 들어 찾아주는 이 없고 또 병조차 들었을 땐, 그 처량함이야 어찌 필설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늙고 병드는 것은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만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추위와 배고픔의 근심, 그리고 돌봐 줄이 없는 고독 속에 놓이게 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신세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화려했던 청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를 때, 자신의 현재 모습과 비교를 해본다면, 몸부림이라도 치고싶은 심정일 것이다. 인생이 덧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고통스런 자에겐 질기고 질긴 게 바로 인생이다.

이 시에는 지은이가 처해있는 서글픈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결코 낭만에 겨운 그런 신세 타령의 시가 아니다. 이미 나이 들어 찾는 이 없어 독수공방의 병든 신세가 되자, 지은이는 지난 40년의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지난 세월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살림이 넉넉지 못해 겪는 어려움과 정든 이들과의 잦은 이별이 그녀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끝구에서 “서글픈 심정에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네.”라 한 것이다. 인생이 그 얼마이건대, 이렇게 눈물로 살아야한다니,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았으면’하는 한탄이 깊게 베어있는 것이다.
이 시는 감상자로 하여금 인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강한 호소력을 가진 작품이라 하겠다.

 

떠난님  사무치게 그리운 어느 겨울

- 기정인(寄征人) -
凄凄北風吹鴛被(처처북풍취원피)요,
娟娟西月生蛾眉(연연서월생아미)를.
誰知獨夜相思處(수지독야상사처)에
淚滴寒塘蕙草時(누적한당혜초시)를.
- 길 떠난 님에게 부치다 -
쌀쌀한 북풍은 원앙 무늬 이불 위에 불고,
어여쁜 서녘 달은 고운 눈썹 그려내네.
뉘라서 알까. 외로운 이 밤 그리움에 사무쳐
찬 연못가 혜초(蕙草)에 눈물 떨어지는 이 순간을.

◆지은이 염씨(廉氏):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이 시는 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눈앞의 경(景)을 통하여 한 치도 남김 없이 쏟아낸 호소력 넘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랑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바로 사랑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잃고싶지 않은 게 바로 사랑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사랑을 위하여 죽음을 택했다. 사랑 때문에 죽음을 택한 이들이 어디 소설 속의 그들뿐이겠는가. 참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정갈하고 열렬한 참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이렇게 강한 힘을 가졌기에 윤리의식이 극도로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여인들도 사랑을 눌러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 부른 그리움을 읊은 염씨(廉氏) 여인의 이 작품에서 그 점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북풍은 문틈을 뚫고 들어와 이부자리를 시리게 하고, 어여쁜 서산의 달은 눈썹 모양을 하고 떠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사람은 겨울 새벽의 이 같은 전경과 마주하게 되면, 그리움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겨울 새벽은 한기(寒氣)가 기세를 매섭게 올리기에, 이때는 따뜻한 님의 품이 가장 좋은 피신처이다. 그런데 곁에 있던 님이 어디로 가고 없다면, 추위는 더 커지고 그리움은 당연히 더 사무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은이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헤어져 있는 사랑은 고통을 일으킨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 시의 끝구에서는 그리움의 고통을 은은하면서도 강렬히 드러내고 있다. 그 시어(詩語)들은 모두가 뼛속을 시리게 하는 힘을 가졌고, 그러한 시어로 이루어진 “찬 연못가 혜초(蕙草)에 눈물 떨어지는 이 순간을.”이란 끝구에는 겨울 새벽에 겪는 뼈아픈 그리움의 고통이 엄청난 밀도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움을 이보다는 더 완벽하게 드러낸 시는 참으로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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