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500여 년이 지나자 신라의 삼국통일로 삼국의 고승들 간에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과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불교의 토착화를 가져왔는데, 선덕여왕 때 자장 대사가 통도사에서 계율종을 처음 창시한 이래 경덕왕 때 법상종(진표; 금산사, 2015. 2.04. 김제 금산사 참조), 무열왕 때 열반종(보덕; 경복사), 문무왕 때 법성종(원효; 분황사), 화엄종(의상; 부석사, 2013.11.06. 영주 부석사 참조) 등 교종(敎宗) 5교가 성립되었다.
통일신라 말 고운 최치원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탑비에서 ‘당에서 법을 구해온 것은 도의가 처음이지만, 절을 짓고 문파를 이룬 것은 홍척이 9산 중 최초’라고 했다. 또, 도의는 하늘을 나는 고니(鵠), 홍척은 대붕(大鵬)이라고 비유하면서 고니는 한 번에 천리를 날아갈 수 있고, 대붕은 9만 리를 날 수 있다고 하여 두 사람을 높게 평가했다. 한편, 청해진의 해상세력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흥덕왕(826~836)은 실상사 창건에 재정지원을 하고 나중에 선강태자와 함께 실상사에 귀의한 사실에서도 증각대사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상사는 조선 세조 14년(1468) 대화재로 소실된 이후 중건하지 못했다.
약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던 스님들은 숙종 5년(1680) 침허(枕虛) 대사가 300여 명의 스님들과 중창에 나섰고,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와 고종 21년(1884)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6·25 때에는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지리산에 숨어있던 공비들이 점거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계곡을 흐르는 만수천 위의 해탈교를 건너면 들판 한 가운데 있는 실상사는 일주문도 없이 해탈교 앞의 매표소가 전부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 어린이 800원이다. 계곡인데도 강이나 다를 바 없는 강폭이 약50m나 되는 만수천을 건너서 실상사로 가는 일은 오랫동안 큰 숙제이어서 해탈교를 건넌 곳에 다리 공사에 시주한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실상사 경내인데, 실상사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약사전, 명부전이 왼쪽에 승방과 승가대학, 왼쪽 깊숙한 곳에 극락전이 있다. 범종각 옆에 기와 파편을 탑처럼 쌓아 놓은 탑(?)과 1989년 범종각 옆에 황룡사 9층탑에 못지않은 9층 목탑지가 발견되어서 천년고찰의 흔적을 말해주는데, 작년 6월에는 경내에서 고려시대에 만든 대형 연못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찰에 연못과 정원을 만든 것은 국내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 월송 대사가 중창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작은 건물인데, 주변에 100여 평이 넘는 부지에 주춧돌이 발굴되어서 원래의 보광전은 훨씬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보광전 앞의 3층 쌍탑은 9층 목탑이 소실된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내 왼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목조3칸의 작은 절집인 극락전 앞에는 탑신은 없이 주춧돌과 머릿돌만 남은 증각대사 응요탑비와 극락전 왼편 담장 밖에 증각대사 응요탑이 있다. 극락전 오른쪽에도 수철화상의 능가보월탑과 능가보월탑비가 있는데, 8각형 탑신마다 섬세한 조각을 한 통일신라시대 조각예술의 걸작들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락전은 마치 두 고승의 탑비와 부도 탑에 에워싼 느낌이다.
한편, 인월에서 실상사로 가는 중간에 가파른 산길로 약1㎞쯤 올라가는 산속에 있는 백장암은 증각대사가 처음 선종을 설파했다고 하는 절로서 암자답지 않게 대웅전을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인 3층 석탑, 석등, 부도탑 등이 있다. 실상사는 국내 사찰 최초로 1996년부터 도법 스님을 중심으로 탁발순례를 하며 생명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1999년부터 귀농학교를 만들어서 귀농·귀촌운동을 돕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