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 細雨(세우) -

簾幕初開水國天(염막초개수국천)한데,
春風十二畵欄前(춘풍십이화란전)을.
隔江桃李連江柳(격강도리연강류)나,
盡入空濛一色煙(진입공몽일색연)을.
- 가랑비 -
주렴을 막 걷어보니 강물이 가득한데,
춘풍(春風)은 그림 그려진 열 두 난간에 불어오네.
강 건너엔 도리(桃李)가, 강 옆에는 버들이 섰는데,
모두가 뿌연 안개 속에 잠겨있구나.

◆지은이 김금원 : 1817(순조17)년에 출생한 원주(原州)의 기녀.
이 시는 비 오는 봄날의 강변 풍경을 읊은 작품으로, 시 속의 안개에 감상자의 옷이 젖는 듯한 느낌조차 일게 한다.
봄비는 막 해동(解凍)된 산하대지(山河大地)에 생명의 젖이 된다. 봄비를 머금은 풀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발양하며 쑥쑥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봄비는 희망의 전령사로 여겨졌던 것이다.

지은이의 거처는 강이 보이는 곳이다. 가늘게 내리는 희미한 빗소리를 듣자 마음에 포근함과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일어나 주렴을 걷어 올리고 저 앞의 강물을 바라보았는데, 어느새 강물은 크게 불어나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봄바람 또한 기름진 봄비와 벗이 되어 지은이가 머무는 전각의 난간 가에 불어와 맴돌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비와 바람이 함께 찾아온다면, 너무나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양기(陽氣)가 천지에 가득하여 생기 넘치는 봄이 왔으니, 이때 찾아온 비와 바람은 정답기 그지없는 손님인 것이다.

저 멀리 강 건너에는 복사꽃이며 오얏꽃이 피었고, 강 이쪽에는 강버들이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비가 내린 이 순간에는 그렇게도 탐스러운 복사꽃과 오얏꽃, 그리고 강버들의 그 자태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풀풀 일어난 물안개가 강변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뚜렷이 다 보이는 것도 좋지만, 안개에 살짝 가려져 있음도 그 나름의 깊은 멋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봄 세계는 비에 의해 전경이 더욱 깊어졌고, 또한 봄비에 의해 지은이의 마음은 더욱 포근해진 것이다. 지은이는 문자를 통하여 이러한 상황을 그윽하면서 탐스럽게 그려내었다.

◆한시 이야기: 중종(中宗) 이후 조선 시단에는 송시(宋詩)의 한 유파인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신기하고 교묘함을 추구했다. 대표자로는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유명하다.


그리워 그리워 내 앞에 님의 환상

133 - 寄呈(기정) -

燭影輝輝曙色分(촉영휘휘서색분)한데,
酸嘶孤鴈不堪聞(산시고안불감문)을.
相思一段心如石(상사일단심여석)하니,
夢醒依俙尙對君(몽성의희상대군)을.

- 님에게 드림 -
촛불은 환하고 먼동은 터 오는데,
슬피 우는 외기러기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소.
그리워하는 이 마음 돌처럼 굳기에,
꿈 깨어 어릿할 땐 그대가 눈앞에 계신 듯하오.

◆지은이 박죽서(朴竹西) : 1819(순조19)년에 출생한 여류 시인.
이 시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사무치는 심사를 강한 호소력으로 드러낸 서정시(敍情詩)이다.
지은이는 호가 반아당(半啞堂)인데 박종언(朴宗彦)의 서녀로 어릴 때부터 높은 시재(詩材)가졌다. 10세에 지은 시를 보면 그의 시재를 알 것이다. 즉 “창 밖에 지저귀는 저 새야(窓外彼啼鳥)/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何山宿便來)./ 응당히 산중의 일을 잘 알 것이니(應識山中事)/ 진달래꽃은 피었는가 안 피었는가(杜鵑開未開).” 나중에 서기보(徐箕輔)의 소실이 되었으며, ‘죽서시집(竹西詩集)’을 남겼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의 사랑은 인생의 행ㆎ불행을 가르는 가장 강력한 기준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몰라도,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만날 수 없다면, 이는 큰 불행인 것이다. 지은이는 서기보의 소실로서 그의 사랑을 깊게 받을 순 있지만, 만나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늘 그리움의 근심 속에 있었던 것이다.

촛불은 여전히 반짝거리는데, 바깥에는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새벽의 외기러기는 슬픈 울음을 울어 남의 속을 후벼놓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움이 깊기에 님을 향한 마음은 더욱더 굳어만 졌다. 그래서 깜박 졸다가 눈을 떴을 때는 마치 님이 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퍼뜩 들었을 땐 그 흔적을 볼 수 없으니, 이때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연인을 비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은이는 심리의 세계와 계절의 환경을 조화롭게 융합시켜 그리움을 진한 호소력으로 드러내었다. 아마 그리워하는 그 사람이 이 시를 읽었다면, 다시는 지은이를 두고 떠나지 못하리라.

◆한시 이야기: 중종(中宗) 이후엔 성리학적(性理學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한 시인들도 나왔다. 즉 서경덕(徐敬德)ㆎ이언적(李彦迪)ㆎ이황(李滉)ㆎ이이(李珥)ㆎ성혼(成渾)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오도(悟道)와 철리(哲理)를 읊었으며, 또한 자연을 노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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