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청호오백리길 15구간 ] 구름고갯길

구름나그네, 대청호 악어를 만나다

 

대청호 주변은 온통 두메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와 산줄기들이 대청호를 호위하며 웅장하게 서 있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대청호의 풍광은 온갖 형용사를 모두 동원해도 모자랄 정도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절경은 더 돋보인다. 대전 근교에서 가 볼만한 곳 하면 가장 먼저 대청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대청호와 그곳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버무려지면 대청호 트레킹은 더욱 생동감을 얻는다. 15구간은 ‘구름고갯길’이다. 그 이유를 찾아 다시 대청호 오백리길에 발을 디딘다. 15구간은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에서 출발이다. 꼬불꼬불 고갯길 넘어 분저리를 지나 대청호를 끼고 거신교(회남면사무소)까지 걷는다. 길이는 약 15㎞, 쉬엄쉬엄 7시간이 걸린다.

 

 #. 구름도 쉬어가는 마을 은운리

은운리 지경마을에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가산천을 따라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정취를 탄다. 숨 한 번만 깊게 들이쉬어도 금방 알 수 있다. ‘신선함’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옥수수가 사람 키 높이를 훌쩍 넘을 정도로 자랐다. 옥수수수염이 난 걸 보니 수확할 때가 다 됐다. 빛깔 좋은 고추도 자라고 기다란 하트 모양의 마 잎도 싱그러운 빛을 발하며 그물망을 덮었다. 온통 초록의 물결이다. 밭일 나가는 촌부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골의 정(情)을 한껏 마음에 담는다.

가산천 옆으로 난 포장길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간다. 은운교를 건너고 이름 없는 또 다른 다리를 건넌다. 졸졸졸 시냇물 소리에 발맞추니 발걸음도 경쾌하다. 냇가엔 계란꽃이라 불리는 개망초도 흐드러지게 폈다.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아서인지 노른자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기다란 하얀 잎이 접혀있다. 하얀 잎이 활짝 피면 영락없는 계란 프라이 반숙이다.

 

기다란 안테나를 곧추세운 여치 한 마리가 길가에 마중을 나왔다. 사람의 발길에도 꼼짝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방해하지 말라는 듯 눈치 한 번 주고는 푸른 나뭇잎을 갉아 먹는다. 향긋한 숲내음, 초록 향기로 힐링 샤워를 하며 유유자적 걷고 쉬고 또 걷는다.

출발지에서 약 2㎞ 지점, 언목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분저리를 향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완만한 비탈길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다. 1시간 정도 걸어 해발 약 260m 정도 위에 서게 된다. 온통 산에 둘러싸여 보이는 건 하늘에 그려진 능선뿐이다. 이제야 구름고개의 의미를 알게 된다. 구름이 쉬어가기 딱 좋은 자리다. 그러고 보니 은운리(隱雲里)라는 마을 이름에 이미 그 해답이 숨어 있었다. 구름이 숨어드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산세가 깊다.

고갯길 정상 즈음에서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향한다. 그제야 산 속에 가려져 있던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옥천 방아실에서 길게 뻗어 나온 산줄기를 굽이굽이 돌아 시원하게 호수가 빠져나간다. 물론 이곳도 훌륭하지만 이 절경 또한 대청호의 흔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조금만 더 가면 15구간의 백미를 만나게 된다.

 

#. 분저리 독수리봉에서 본 절경

2시간 남짓 걸었을까, 출발지에서 4㎞ 지점. 고갯길 넘어 쉬엄쉬엄 내려오다 보면 왼쪽으로 무덤들이 보인다. 그 무덤 위로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500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입이 떡 벌어지는 절경과 만난다. 그곳엔 조망데크까지 마련돼 있는데 입구에 안내판이 없어 자칫 넋 놓고 고갯길을 넘었다간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대청호 조망데크가 있는 곳은 분저리 독수리봉이다. 큰 악어 한 마리가 호수 위에 떠있는 모습이다. 마치 곧바로 달려들 기세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하늘빛이 수면에 닿아 파랗고 은운리 고갯길에서 잠시 쉬다 온 구름도 이곳에서 다시 휴식을 청한다. 고요 속의 외침, 레저용 보트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면 금새 그 파장은 원을 그리며 수면을 흔든다.

 

‘절반은 청산이고 절반은 청류. 늙은 바위에 걸터앉으니 세상 근심 사라지네. 무릉도원 좋다한들 이보다 나을 쏘냐….’ 누군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남긴 시구를 읊조리며 잠시 안구정화를 한다. 속된 말로 저절로 멍 때리게 하는 절경이다. 6㎞ 고갯길 여정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최고의 선물이다. 분저리는 농촌체험마을로 유명한데 농촌체험과 함께 꼭 들러야 할 명소로 자리잡았다.

분저리부턴 다시 포장길이 이어진다. 그래도 지루할 틈 없이 대청호의 아름다운 모습이 손짓한다.

#. 감입곡류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벌써 해가 중천이다. 분저리 농촌체험마을을 빠져 나오면 아스팔트길이 이어지는데 뜨겁게 달궈졌다. 발걸음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그래도 어디선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대청호에 물이 담기기 시작하면서 많은 마을들이 물에 잠겼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계곡까지 물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독특한 지형이 생겨났는데 이 모습이 대청호의 킬러 콘텐츠가 됐다. 수몰의 아픈 기억도 금강, 그리고 대청호의 새로워진 풍광에 사르르 녹는다.

대청호 중에서도 옥천과 보은 사이는 감입곡류(嵌入曲流)의 절정을 보여준다. 쉼 없이 돌고 돌아 대청댐과 맞닿는다. 마치 퍼즐조각처럼 현란한 곡선의 미(美)를 뽐낸다. 물론 시원하게 뻗은 직선의 장쾌함도 대청호는 간직하고 있다. 이 퍼즐조각의 경계를 따라 걷는 대청호 트레킹은 그래서 중독성이 있다. 시야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천의 얼굴이 자꾸 궁금증을 자아내고 그곳에 도달하면 절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곡선과 직선의 조화는 늘 그렇다. 장쾌한 감입곡류는 옥천 오대리를 끼고 금강이 휘도는 10구간이 일품이고 15구간에선 아기자기한 맛을 볼 수 있다. 물론 어떤 형태의 감입곡류든 일단 그 묘미에 닿으려면 산을 올라야 한다.

 

#. 그 옛날의 추억 한 보따리

대청호의 끝자락을 따라 이어진 꾸불꾸불한 포장도로를 타고 종착지를 향해 걷는다. 분저리부터 대략 7∼8㎞가 남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넘실대는 대청호의 넉넉함을 볼 수 있었겠지만 여기도 가뭄의 여파에서 벗어날 순 없었던 모양이다. 물이 많이 빠져 아쉽긴 한데 그동안 숨겨진 대청호 바닥이 드러나면서 또 다른 운치를 선사한다. 대청호를 바로 옆에 두고 걸을 수 있으니 또한 새로운 즐거움이다. 물이 얼마나 많이 줄었는지 물속에 잠겼던 봉우리들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기둥만 남은 고목도 모습을 드러내 ‘태초’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대청호반 분저나루 초록 밭에서 놀다 다시 길을 찾아 나온다. 외롭게 서 있는 한그루의 복숭아나무에서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종착지인 거신교가 저 멀리 눈에 들어온다. 판장소교를 지나고 또 다시 판장대교를 건넌다. 조곡리 사실마을에 미치기 전, 또 다시 대청호의 감입곡류가 눈을 사로잡는다.

회남면 면소재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나무데크길이 성곽처럼 마을을 감싸고 이어져 있다. 마을 뒤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간다. 주홍빛 노을이 대청호에서 퍼져나간다. 분주했던 마을에도 이제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조곡리 사실(새실)마을 앞, 옛날 사진들이 담긴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섶다리가 장마로 끊겨 다리 걷고 영당으로 장보러 갔었지. 가재또랑에서 가재·중태기 잡아 끓여 먹었지. 주막거리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 하면서 놀았지. 각시둠벙에서 멱감고 오다가 복숭아 서리해 먹다가 들켰지. 군량뜰에 모심을 때 물이 모자라 도링이 입고 물댔지. 경범이네 외할머니 사랑방에서 묵내기 화투치며 놀았지. 방앗간 옆 공터에서 추석맞이 콩쿨대회도 하고 공회당 앞마당에선 낮엔 자치기하고 밤엔 도둑놈 잡기도 했었지.’

옛날 아름말에 살던 추억들이 담긴 안내판과 사진을 보면서 마을도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은 예전에 담배농사가 아주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5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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