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산골이 품은 호수 … 호수, 가을을 비추다

 

[ 대청호오백리길 18구간 ] 장수바위길

 두메산골이 품은 호수 … 호수, 가을을 비추다

 

다소 지루할 거라 생각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볼거리가 지도상에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기대치가 높아진 것일까. 이제 더 이상 대청호 오백리길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 설렘이 심장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래 오감이 다 무뎌졌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참맛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 자만이었다. 아직 멀었다.

자연을 어찌 맞이해야 하는지 한참 더 배워야 한다. 큰 것과 작은 것, 화려한 것과 누추한 것, 이 극단 사이에서 판단을 저울질하는 습관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름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만족을 느끼는 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리를 대청호 오백리길 21구간 마지막 여정의 종착점에서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열여섯 번째 걸음, 이번엔 대청호 오백리길 18구간 장수바위길이다. 충북 청주시 문의면 소전리 소전교에서 염티리, 문덕리, 236봉 장수바위·산불감시초소, 묘암삼거리, 문의면 산덕리 상산마을까지 이어지는 약 11㎞ 코스다. 약 5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이 구간에도 플러스 알파(α) 코스가 있다. 묘암삼거리에서 마동길을 따라 마동창작마을에 이르는 거다. 이 18-1구간은 왕복 9㎞다.

<18구간 경로> - 상세 경로(GPS)는 기사 뒤에 있습니다.
충북 청주시 문의면 소전리 소전교 - 염티리- 문덕리 - 236봉 장수바위- 산불감시초소 - 묘암삼거리 -문의면 산덕리 상산마을 / 11㎞, 약 5시간.

 

 # 성큼 다가온 가을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던 것으로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대전지방기상청이 지난 1일 발표한 올 여름 기상 특성 자료를 보니 평균기온은 25.3도로 평년 평균, 그러니까 지난 30년치 평균과 비슷했다. 아마도 내 몸이 기억하는 건 장마 후 지루하게 이어졌던 폭염과 열대야 탓이리라.

절기상 처서(處暑)가 지난 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더위에 지친 내 몸도 금방 알아차렸다. 물론 계절의 그 미묘한 흐름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건 자연의 생명체들일 거다.

18구간의 시작점은 문의면 소전리 소전교다. 계절이 봄으로 넘어가던 시점이었던 지난 3월 초에 한 번 섰던 곳이다. 당시엔 여기서 17구간 여정을 시작했다. 그땐 옅은 갈색빛이었는데 지금은 온통 초록빛이다. 소전교가 말해주듯 이곳 소전리와 후곡리 사이엔 개울이 흘렀다. 소전리 아이들은 이 개울을 몇 번씩 건너 후곡리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지금은 대청호가 계곡 깊숙한 이곳까지 후벼 파고 들어와 호수를 이루고 있다. 대청호 조성 이후 소전리엔 호반을 따라 길이 났다. 청남대 경호 차원에서 이곳에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이 많이 들락날락 했는데 그 때문인지 길도 빨리 나고 전기도 빨리 들어왔다고 한다.

차 한 대가 바듯이 지날 수 있는 제법 운치 있는 길을 따라 염티삼거리로 향한다. 4㎞ 외길이다. 왼쪽으로 간간이 대청호 푸른 물빛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포도도 영근다. 이른 아침 안개가 계곡을 채워 신비롭다. 높은 산에서 감상하는 운해가 부럽지 않다. 가을이 깊어지면 안개도 더 자욱해지겠지. 어느새 달빛을 닮은 해가 산봉우리 위까지 올라 안개를 조금씩 걷어낸다.

출발지점에서 약 1.5㎞ 정도 걸어오면 초록빛을 머금은 옥색 대청호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가뭄 탓에 물이 많이 줄어 아쉬움이 남는다. 호수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잡는다. 길가에 우뚝 솟은 자작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시원한 소리를 선사한다. 3㎞ 지점. 산기슭의 한 농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확히 말하면 담배건조창고가 그렇다. 대청호반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건데 볼 때마다 시선을 빼앗긴다. 농가 담장 역할을 하는 사과나무에선 사과가 조금씩 빨갛게 익어간다.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문덕리 마을이 나온다. 확성기를 통해 뽕짝 가락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그것도 아주 크게. 수확의 계절이다.

 

# 가을맞이 준비하는 호반풍경
소전리 외길이 만나는 곳은 염티삼거리, 회남문의로 지방도 509호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염티리 마을과 문덕리 마을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염티재를 넘어 보은·회남으로, 북쪽으로 가면 청주·문의로 가는 길이다.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이 길은 각종 물산이 오가던 주요 통로였다. 특히 소금장수들이 소금포대를 짊어지고 고개 너머 충북 내륙과 경상도로 소금을 공급했다. 서해에서 난 소금은 금강과 내륙을 몇 번씩 오가며 이곳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이 고개를 염티재라 했다고 한다. 염티재 얘기는 16구간에서 보따리를 풀도록 하고 다시 18구간 얘기로 돌아가자.

염티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면 문덕리 푯말이 나온다. 다시 마을 안쪽으로 길을 잡는다. 가뭄 탓에 초지가 제법 많이 드러나 농지와 어우러진다. 소전리에서 들렸던 뽕짝 가락이 더 커졌다. 마을 과수원 전봇대에 매달린 성능 좋은 확성기 두 개가 고막을 때린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배나무 과수원길을 따라 걷는다. 산기슭 호반을 따라 대청호 깊숙이 파고든다. 산줄기의 끝자락, 가슴 벅찬 대청호가 펼쳐진다. 잔잔한 호수는 이내 푸른 산과 나무를 비추고 파란 하늘과 구름도 오롯이 담아낸다. 두메산골 골짜기라는 그릇에 물이 담겨 생긴 이 풍경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래 이 맛이야!”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빠질 수 없다. 이 길로 곧장 산에 올라야 하지만 정상에선 여기만큼 호반 풍경을 기대하기 어렵다. 미련이 남아 이곳에서 시간을 잡아먹어 본다.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제 산행을 시작한다. 문덕리마을 뒷산인 236봉에 오르는 길이다. 초반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벌목 흔적을 쫓아 산 위로 오른다. 10분 정도 고비를 넘으면 평탄한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조금 더 오르면 백설기를 썰어 놓은 듯한 사각형의 장수바위를 지나고 거기서 조금 더 힘을 내면 정상에 우뚝 선 산불감시초소를 만난다.

 

산 오름은 약 35분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다. 초소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산골짜기 사이로 난 길이 선명하다. 묘암리 가는 길이다. 산에 가려 마동리는 보이지 않는다. 묘암리에서 산을 둘러가야 마동창작마을에 이를 수 있다. 이 길이 바로 18-1구간이다. 일정상 플러스 알파구간은 며칠 뒤 다시 찾기로 하고 본 코스로 길을 잡아 하산한다.

# 실개천 따라 매미의 일생을 노래하며
산을 내려오면 다시 509호 지방도와 만난다. 문덕리마을 입구가 지척인 곳이다. 그냥 도로를 따라 걸었다면 10분이면 족했을 것이겠지만 그러면 가슴 벅찬 대청호반의 풍경을 포기해야 한다. 잠시 509호 지방도를 걸으면 문덕교를 만난다. 문덕교에서 약 100m 정도 가면 왼편 작은 개울 쪽으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그곳으로 진입한다. 이 개울물 소리만 따라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길에 진입하자마자 개울물이 길을 가로막는다. 원래 징검다리가 있다고 하는데 요새 며칠 비가 내려서인지 물이 불어나 징검다리가 무용지물이 됐다. 그냥 건널 수밖에. 맨발을 개울물에 담근다. 엄청 시원하다. 실개천 바닥 돌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이따금 발을 찌르지만 그리 성가시진 않다.

잠시 물놀이를 즐긴다. 소나기가 쏟아진다. 나무 아래서 잠시 비를 피한다. 깨알 같은 재미지만 이런 게 더 재미난 법이다. 다시 신발 끈을 조여매고 개울 옆 오솔길을 걷는다. 작은 마을 경작지 농로를 따라 이제 생(生)을 다해가는 2015년의 여름을 온몸으로 느낀다. 벼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여름 내내 절박한 울음을 토해냈던 매미도 이제 생을 마감한다. 매미의 일생을 소재로 막바지 구간을 걷는다.

땅에 떨어진 매미 한 마리. 이 매미는 7년 전 나뭇가지 속에 남겨진 하나의 알이었다. 이듬해 6월 알에서 깨어나 스스로 땅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땅 속을 파고든다. 캄캄한 지하세계에서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아먹으며 1년, 2년…6년, 이렇게 6년간 4번의 탈피를 마치고 7년째 되는 어느날 땅거미 지는 저녁, 땅을 뚫고 드디어 땅 위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놈, 본능적으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뭐든지 잡아 붙들고 기어오르지만 이내 천적의 먹이가 된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은 나무에 기어올라 안전한 곳에 발톱을 박아놓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끝은 우화(羽化). 드디어 껍질을 벗고 몸과 날개를 편다. 7년의 기다림, 그러나 앞으로 살날은 고작 2주. 짝을 기다리는 절박한 노래를 시작한다. 수컷은 울고 암컷은 나뭇가지에 알을 남긴 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매미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 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유홍준 ‘우는 손’ >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8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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