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계절이 먼저 오고, 뒤서거니 풍경이 따라 오고

 

[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 벌랏한지마을길

앞서거니 계절이 먼저 오고

 뒤서거니 풍경이 따라 오고 

낮과 밤(새벽)의 기온차, 즉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걸 보니 가을이 찾아오긴 했나보다. 낮엔 여전히 여름더위의 기세가 기승을 부리는데 새벽엔 비교적 쌀쌀한 바람이 분다. 그러고 보니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한참 지났고 춘분(春分)에 이어 다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또 한 번 계절의 문턱을 넘어섰다.

가을은 이렇게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하늘빛이 더욱 파랗고 그래서 시골동네 아궁이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더 선명하다. 한낮 햇빛에 양분을 얻으며 벼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열일곱 번째 걸음, 이번엔 대청호 오백리길 16구간이다.

이 길은 벌랏한지마을길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벌랏한지마을이 포인트인가 보다. 16구간은 회남면사무소(충북 보은군 회남면 거교리), 남대문교 소공원, 남대문리, 거구리, 325봉, 벌랏한지마을, 소전리보건진료소로 이어지는 약 10㎞ 구간이다. 쉬엄쉬엄 약 5시간이 걸린다. 소금재가 있는 거구리마을 뒷산을 오르는 1시간 구간을 빼면 대체로 평이한 코스다.

 

# 가을… 물안개, 햇빛에 부서지다

다소 인내심이 필요했던 15구간의 종착지, 회남면사무소에 다시 섰다. 회남면소재지인 거교리다. 회남면 북쪽에 위치한 거교리엔 것다리(거교), 날방, 멱골, 본말, 사당마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것다리는 큰 다리가 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날방은 것다리 남쪽 산을 깎아 조성된 마을이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나지막한 산고개 끄트머리를 ‘날방’이라고 불렀다. 멱골과 본말, 사당마루는 대청댐 조성과 함께 수몰됐다.

현재 날방 주변은 대청호를 따라 산책길이 조성됐다. 사담길이라고 부르는 데크길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거교리는 사담리 일부를 편입했는데 사담이라는 옛 지명을 살리기 위해 사담길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 길은 16구간을 시작하기에 앞서 워밍업(warming up, 준비운동)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어슬렁거리면서 대청호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16구간을 통틀어 이만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 최대한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좋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고요했던 대청호반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전날 햇빛에 달궈진 호수 표면을 차가운 공기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뽀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복사냉각’ 현상이 빚어낸 예술작품이다.

사담길을 걷다 물안개와 더욱 가까이 만나기 위해 호반으로 내려섰다. 마을 선착장이 있는 곳이다. 햇빛이 산 능선을 넘어서자 이내 물안개는 햇빛에 부서진다. 물 분자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느낌이랄까?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말해 일교차가 더 커지면 이 물안개 효과도 극대화 되리라. 신비로움을 연출하는 물안개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수면 위에서 썰매 타듯 미끄러진다. 먼지 한 줌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 물안개를 따라 이제 여정을 시작한다.

 

# 대청호반 길 따라 남대문마을로

1㎞ 남짓한 사담길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를 삥 둘러 감상하고 나오면 회남로와 만난다. 회남로를 따라서도 꽤 널찍한 데크길이 나 있다. 회남면수몰유래비와 수초재배섬 등을 만나면서 남대문교까지 간다. 회남면수몰유래비는 회남면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인데 약 1000자 정도 꽤 긴 글이 새겨져 있다.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내려가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글 끝에 이렇게 쓰여 있다. ‘뒷면에 계속.’

회남면 수몰유래비에서 내려와 조금 더 걸으면 수초재배섬과 어우러진 대청호를 볼 수 있는 조망대가 나온다. 대청호 수질을 관리하기 위한 것인데 사실상 교육적 목적이 더 크다. 대청호 수질을 좋게 하려면 충청인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금강 상류지역의 수자원 보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가 많이 내려 상류에서 오염물질이 쓸려 내려오면 수초재배섬 같은 건 무용지물이다. 모든 것엔 다 한계라는 게 있는 거다.

수초재배섬 옆으론 남대문교가 나 있다. 다리를 건너면 대청호 오백리길 6구간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가로질러 남대문리 마을로 들어간다. 남대문교 앞에 세워진 마을유래비를 한 번 읽어보고 들어가면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마을유래비에 따르면 마을엔 호점산성 터가 남아 있는데 이 성의 남쪽 문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남대문리가 됐다고 한다.

 

다리에서 약 800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돌탑을 만나게 된다. 대청호반 마을의 흔한 풍경이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시골마을의 아침을 깨운다. 집집마다 아궁이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른다. 시골 인심이 다 그렇듯 마당을 쓸고 계신 할머니 한 분께 인사를 드렸더니 인사만 받지 않는다. 두 마디, 세 마디 더 거드시더니 “밥은 먹었느냐”고 꼭 물어보신다. 요즘 ‘밥 먹었느냐’는 말은 그냥 인사치레인데 시골 할머니의 물음은 진짜 걱정스러워 그러신 것 같다. 대답을 잠깐이라도 주저하면 당장이라고 손을 잡고 마루로 끌고 들어갈 기세다.

시골의 정(情)만큼 마을 곳곳은 아주 따사롭고 풍요롭다. 벼가 노랗게 익고 사과도 빨갛게 익어간다. 보은의 자랑, 대추나무에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제법 갈색 빛이 감도는 게 거의 다 익어가는 모양이다. 감나무도 버라이어티 하다. 감의 변천사를 모두 보여준다. 연두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주홍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한 나무에 모두 표현돼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풍경이다.

남대문1리 마을을 빠져나와 거구리로 향한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준비해야 한다. 마을에서 산에 오르는 길 초입, 해바라기들이 길을 따라 늘어 서 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과 어우러져 산뜻한 기분을 선사한다. 자연의 에너지를 머금고 힘을 낸다. 이제 약 3분의 1 지점을 통과했을 뿐이다.

# 옛 소금장수의 고된 길을 따라

이 지역에선 유독 소금과 관련한 지명이 많다. 염티고개, 소금재, 소금골 등이 그것이다. 거구리 뒷산에도 소금재라는 게 있는 걸 보니 옛날 소금이 귀했던 시절, 소금포대를 나르던 소금장수들이 꽤나 많이 이용했던 길인 듯하다.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금강을 낀 마을엔 나루터가 많았다. 금강을 거슬러 신탄진에 물산이 모이면 뱃길을 따라 내륙지역 곳곳을 파고들었다. 소금도 마찬가지다. 서해에서 난 소금이 보은, 옥천 등지로 퍼져 나가려면 꼭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지금은 문의와 보은을 잇는 도로(회남문의로, 지방도 509호)가 났는데 문의면 염티리에서 남대문리를 넘어가는 고갯길 이름도 염티재다. 염티리에 소금이 모이면 소금장수들은 이 고개를 넘어 경상도 상주 쪽으로 소금을 날랐다고 한다. 문의와 보은의 경계에 있는 소금재와 소금골 역시 소금이 모이던 곳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소금재를 넘어 소금골로 빠져나오는 산길은 약간 가파르다. 아직 정비가 덜 된 탓에 숲이 우거져 길을 찾기가 조금 어렵다. 산을 내려와 소금골에 닿으면 벌랏선착장이 지척이다. 이제야 감이 잡힌다. 나루터가 있던 걸 보니 이곳에도 소금배가 당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소금골이란 이름이 있고 여기서 소금재를 넘어 보은으로 소금을 날랐던 모양이다.

# 오지 중의 오지 벌랏한지마을

소금골에 도달해 우선 300m 정도 걸어 들어가 벌랏선착장을 둘러본다. 시골 버스정류장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외진 곳에 웬 버스정류장? 그렇다. 아니다. 선착장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잠시 머물던 곳이다. 아무튼 이 버스정류장 비슷한 곳 아래로 배 접안 시설이 나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이곳은 문의에서 들어오는 길이 나기 전까지 마을사람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올해는 가물어서 호숫물이 선착장 저 멀리에 머물러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나와 본격적으로 마을로 진입한다. 소전1리, 벌랏한지마을이다. 역시나 돌탑과 당산나무가 마을 입구를 표시한다. 첩첩산중 산골짜기에 이런 마을이 또 있을까. ‘웰컴 투 동막골’을 연상케 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천지가 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요즘은 소전2리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임도가 생기면서 차가 왕래할 수 있지만 그 전엔 오지 중의 오지였다. 한국전쟁 때 전쟁이 난 지도 모를 정도로 외진 곳이다. 지금은 대략 2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정착해서 생겼다고 한다. 마을 역사가 대략 500년 정도 된 셈이다. 정착민들은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특히 닥나무로 한지를 생산했던 마을로 유명하다. 지금은 수백 년 전통을 잇는 종이공장이 생기면서 유명해졌다. ‘벌랏한지마당’이란 이름을 가진 건물에 들어서면 전통 한지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내고 방망이로 두드려 무르게 한 뒤 채로 걸러 한지를 만드는 방식이다. 말이 쉽지 이 과정이 족히 1년은 걸린다.

이곳 사람들은 봄에 이렇게 한지를 만들어 대전, 옥천, 청주 등지로 나가 팔았고 가을 추수 때 쌀로 종이 값을 받았다. 이곳이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된 뒤부턴 마을 모습도 상쾌하게 변했다.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졌다. 벽화를 따라 길을 잡으면 어느새 마을 집에 도달한다. 요즘은 호두 수확이 한창이다.

나무로 틀을 잡고 흙을 덧칠해 만든 담배건조장과 넝쿨담 넘어 한옥을 이층으로 개조한 집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태양열을 모아 전기를 모으는 시설들이 아주 많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선 자연 풍광을 해치는 전봇대를 뽑아버릴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마을 곳곳을 둘러본 뒤 마을을 벗어난다. 마을 북쪽에서 서쪽(소전2리)으로 난 임도가 유일한 육로다. 포장길이어서 운치는 덜하지만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가 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미루나무가 곧게 뻗어 제법 운치를 살린다. 약 50분 정도 꼬불꼬불 나 있는 임도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면 16구간의 여정은 마무리 된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6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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