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다 더 정교한 리아스식 해안선
속살 드러낸 호수 위로 길을 만들다

   

[대청호오백리길] 6구간

바다보다 더 정교한 리아스식 해안선
속살 드러낸 호수 위로 길을 만들다

이제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다.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한낮 햇볕은 여전히 강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더운 기운을 식혀준다. 산과 대지는 어느덧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다.눈에 보이진 않지만 아침이슬과 찬 공기의 자극을 받은 나뭇잎 속 엽록소가 색소를 분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카로티노이드(Carotenoid) 색소가 드러나면 노란색으로, 광합성 작용의 산물인 잎 속 당분으로부터 많은 효소 화학반응을 거쳐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 생성되면 붉은 색으로, 타닌(Tannin) 물질이 산화·중합돼 축적되면 갈색으로 물든다. 이달 중순(14일경)이면 단풍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2주일쯤 뒤, 그러니까 이달 마지막 주엔 대청호도 완전히 단풍 옷을 입을 전망이다.

일교차가 커진 탓일까. 요즘 대청호 오백리길 여정에 나설 때면 조바심이 난다. 아침 햇살과 함께 뽀얗게 피어나는 물안개가 보고 싶어서다. 물론 여명의 그 찬란한 순간을 만끽하고픈 기대도 크다.

열여덟 번째 걸음, 이번엔 6구간이다. 이 계절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미루고 미뤄왔던 그 길, 바로 대추나무길이다. 대전에서 출발해 충북 청주와 보은 땅을 두루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길, 구간 길이만 공식적으로 16.5㎞에 이른다. 대청호 오백리길 21개 구간 중 가장 길다. 긴 연장답게 '대청호의 흔한 풍경'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외도’의 유혹이 많은 길이다.

지난달 25일 이뤄진 6구간 여정은 이렇다. 대전 내탑동 와정삼거리-꽃봉 갈림길-성황당고개-개치고개-오동 토방대-오동 안골-산적소골-대청호반-대추나무단지-연꽃단지-법수리선착장-어부동-산수리길-대추나무단지-마름골-사음리-회남대교-양중지-보은 회남 남대문교 소공원. 외도를 많이 한 탓에 21.6㎞, 장장 10시간(점심 및 휴식시간 1시간 30분 포함)을 걸었다. 다리는 힘들지만 눈이 즐거운 길이다.


 

# 대청호의 품에서 아침을
오전 7시, 와정삼거리에서 발걸음을 뗀다. 방아실 쪽으로 20m 정도 걸어가다 왼쪽 편으로 꺾어 등산을 시작한다. 말이 등산이지 오솔길 산책 정도 수준이다. 꽃봉 갈림길까지 약 1.2㎞(20분)가 7구간과 겹친다. 오른쪽으론 보은 땅. 첩첩산중에 걸쳐있는 운해가 아침의 고요함을 선사한다. 꽃봉 갈림길에서 국사봉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15분 정도 더 산행을 하면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회남대교가 안개를 헤치고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 구간의 막바지인 회남대교가 손에 잡힐 듯한데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성황당고개를 넘어서면서 보은 땅에 진입한다. 산행을 마치게 되는 개치고개까지 줄곧 대청호반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포장길이 나기 전까진 회인(보은) 사람들이 대전에 가려면 유일한 길이 바로 강 건너 이 고갯길을 넘는 것이었다.

출발점에서 대략 1시간 15분, 개치고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경주 이씨가 많이 살았던 토방터(동구 주촌동) 마을입구로 들어선다. 약 15분 정도 마을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대청호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가뭄에 물이 많이 줄어든 탓에 약간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물이 빠진 자리엔 이름 모를 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라나 고운 색감을 드러낸다. 여름과 가을의 공존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다. 마을 선착장에서 시원한 바람에 가볍게 흘러내린 땀을 식힌다.

# 리아스식 해안선의 진수
대청댐으로 인해 계곡에 물이 담기면서 대청호엔 기이한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안선보다 더 복잡한 선들이 구불구불 윤곽을 드러낸다. 6구간은 이런 해안선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물이 많이 빠진 탓에 해안선을 따라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뇌를 자극하지만 그 길이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가 없다.


선착장을 돌아 나와 오동 마을길을 걷는다. 오동 버스승강장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또 다른 오동 버스승강장이 나온다. 승강장에서 다시 마을길로 접어든다. 또 다시 대청호의 흔한 풍경과 마주한다. 현란한 곡선의 해안선이 발길과 시선을 붙잡는다. 물이 빠지자 수몰된 마을의 흔적들도 아주 조금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돌담이 그렇고 처량한 고목의 뿌리가 그렇다. 그렇게 옛 정취를 머릿속에 그리며 호반을 유유자적 걷는다. 시간이 멈춘 듯 이곳 세상은 고요하고 또 신비롭다. 파란 하늘, 뭉게구름 아래 펼쳐진 대청호반의 아침은 이렇게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
호수 건너 17구간 청주 문의면 후곡리·가곡리 땅을 옆에 두고 호반을 걷다 다시 마을길로 빠져 나온다. 해는 벌써 중천에 걸터앉았다. 마을길로 접어들자 가을이 마중을 나왔다. 사방천지 대추나무에 대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나뭇잎이 단풍 들듯 대추나무 열매도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며 가을의 시간을 쫓고 있었다. “하나 따 먹어 볼까?” 마음은 굴뚝같고 몇 번이나 잘 익은 대추에 손이 갔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 대추나무밭 쥔장에게 걸리는 날엔 끝장이다. 그냥 눈으로 그 달달함을 맛 볼 뿐.


지도를 보지 않아도 여기가 어딘지 금세 알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대추나무는 이곳이 보은 땅임을 말해준다. 대추나무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햇살을 머금은 대추가 장관이다. 언덕 위 오두막 하나. 길을 오르며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주저하며 끝내 선의 길을 걸었던 그 대견함을 본 것일까. 대추나무 과수원 쥔장 아주머니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냥 따 먹어보지 그랬어……” 그러면서 몇 알을 건네주신다. 한 알을 깨무는 순간, 그 달콤함의 유혹은 뇌신경을 자극하고 급기야 손에 명령 신호를 전달해 지갑을 열게 한다. 며칠 있으면 추석, 명분도 좋다. 만 원어치를 주문하고선 아주머니와 함께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으로 대추를 따냈다.

다 합해보니 한 소쿠리다. 우리 일행은 세 명. 아주머니가 비닐봉지에 나눠 담는데도 한참이 걸릴 것이란 계산이 바로 선다. 그냥 멍하니 서 있을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눈과 손은 대추에 닿아 있었다. 아주머니는 모른 척 해주신다. ‘니들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 하는 심정이었을까? 대추를 소재로 아주머니와 이야기 꽃을 피우고 다시 길을 잡는다.

언덕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온통 대추나무가 늘어서 있다. 또 따 먹는다. 물론 헤어지는 길에 “심심하면 대추 따 먹으면서 가라”는 쥔장의 허락이 있었다.

# 땅 끝에서 만난 무릉도원
대추나무밭을 빠져나오자 다시 아스팔트길과 만난다. 이번엔 법수리 버스승강장이다. 다시 마을길로 들어서 30분 정도 한적한 길을 쫓아가니 또 다시 대청호가 눈에 들어온다. 보은군 회남면 사음리 어부동마을의 대청호 풍경이다. 가을과 겨울, 대청호의 풍경을 책임지는 억새가 계절보다 먼저 대청호에 자리를 잡았다. 뽀얀 솜털을 흩날리면서 말이다.

 마을 갈림길, 오른쪽으로 다시 방향을 튼다. 연꽃단지가 보인다. 철이 지나 몇 송이만 마지막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부동 날망에서 산수리로 들어선다. 파란 하늘과 푸른 산, 그 빛을 담아내는 대청호, 그리고 소담한 산수앞골 마을 집들이 그림 같이 펼쳐진다. 큰 감나무에선 감들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사과밭에선 사과들이 제 빛깔을 찾아간다. 이곳 역시 대추가 빠지지 않는다. 산수리(山水里) 마을 이름답게 산과 물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농촌풍경을 선사한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곧장 회남대교로 향할 수 있는데 한 군데 들를 곳이 있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대로 직진. 한 시간을 걸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지도를 보면 6구간 지형은 대전에서 한 줄기 산자락이 뻗어 나와 대청호 깊숙한 곳에 이른다. 거의 섬과 같은 곳이다. 6구간의 시작점에서 보면 땅끝에서 회남대교로 또 다른 육지와 연결된다. 이 땅끝이 바로 6구간의 절정과 맞닿은 곳이다.

20분 정도 숲길을 따라 들어가자 땅 끝과 마주한다. 마름골이란 이름을 가진 곳이다. 땅 끝에서 또 다른 돌기 하나가 삐져나와 대청호 더 깊숙한 곳으로 안내한다. 발길이 저절로 멈춰진다. 숨이 막히고 말문이 닫히는 절경이 펼쳐진다. 사방이 대청호 푸른빛이다. 약 15㎞, 긴 여정의 피로가 한 방에 녹아내린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뇌가 마비돼 발바닥의 통증 따위는 금세 잊힌다. 흐린 날 안개와 함께라면 더 좋을 듯하다는 생각도 잠시, 머릿속 온갖 잡생각은 한눈에 가득 차는 풍경에 씻겨 내린다.

절경의 한 자락에서 유심히 바라보니 바로 정면에 뱃길이 있을 법한 골짜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머릿속에 대청호 지도를 그려보니 육로가 나기 전 벌랏마을의 유일한 통로였던 뱃길 입구다. 큼지막하고 판판한 돌덩어리에 앉아 지난 여정을 복기하면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가슴 벅찬 느낌을 만끽한다.

# 회남수역의 절경을 뒤로하고
이제 구간 여정의 막바지다. 대청호 회남수역의 절경을 벗삼아 호반을 둘러둘러 걸어 나오면 여정 초반에 손에 잡힐 듯 보였던 회남대교와 만난다. 대전 땅과 보은 땅이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곳, 신경세포로 치면 신경전달물질이 신경세포에서 또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되는 시냅스와 같은 곳이다.

회남대교부턴 아스팔트길을 따라 걷는다. 그렇다고 심심하진 않다. 오른쪽으로 대청호반이 또 다시 펼쳐진다. 양중지 마을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입에 물고 쉬엄쉬엄 걷는다. 대청호 풍경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구간의 종점 남대문교에 이른다. 여명에 잠을 깼던 남대문교의 하늘은 이제 석양으로 물든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6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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