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들 그리고 비단길. 대청호 오백리길 12구간의 키워드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모두 21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구간마다 이름이 있다. 이 이름이 곧 구간의 특징을 캐치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된다. 처음엔 ‘왜 그럴까?’라는 호기심이 발길을 이끌고 나중엔 그 답을 발견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다. 결국 가봐야 궁금증을 풀어낼 수 있다. 마음의 평온과 여유를 만끽하는 즐거움은 덤으로 따라온다.

스무 번째 걸음. 12구간은 옛 청마초등학교(충북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에서 시작된다. 두메산골 말티마을 지나 가덕교까지 금강 따라 걷다 다리를 건너 다시 강 따라 안남면사무소까지 걷는 코스다. 약 14㎞, 7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코스의 약 3분의 2가 금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어 다소 지루할 것 같지만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일상생활에서 무뎌진 신경세포가 다시 활성화되는 희열을 느낄지니.

 

#. 80세 소녀 ‘김봉난’이 궁금하다
옥천 청마리, 이 두메산골에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이 산다. 글을 쓰는 할머니라는데 작품을 접할 길은 없고 아무튼 대단하다는 풍문만 나돈다. 12구간 초반은 이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출발지인 청마초 폐교(현재 옻 배움터로 새 단장)는 이번이 두 번째다. 몇 달 전 11구간을 마무리 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

 

 

그러니 폐교 옆에 있는 ‘청마리 제신탑’에 서는 것도 두 번째다. 이게 충북 민속문화재 제1호라는 사실도 새삼 놀랍다. 원탑(조산탑), 솟대, 장승, 산신당 등 4가지의 복합적인 마을 상징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게 보전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마을 내력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뜻일 게다.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옆 비석에 새겨진 청마리 마을유래를 슬쩍 읽어보고 산행을 시작한다. 청마리는 청동리와 마티리가 합쳐지면서 생긴 이름이란다. 대청호엔 이런 지명이 참 많다. 마을내력도 그만큼 복잡하다.

 

 

마을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제 막 물들기 시작했다. 나뭇잎에서 광합성과 색소 분비가 활발해지면서 잎이 노랑, 빨강, 갈색으로 물들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 가을 정취를 책임지는 건 따로 있다. 바로 강렬한 주황색을 가진 감이다. 감나무가 참 많기도 하다. 집 마당에선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말리는 작업도 한창이다. 산기슭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마을길을 걷다보면 오래된 외양간도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뇌에 박혀있는 ‘외양간’이란 단어와 그 이미지를 일치시켜 본다.

 

 

15분 정도 산을 오르니 금강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내달려오는 장관이 눈에 들어온다. 임도에서 살짝 벗어나는 길이 하나 있는데 여기로 길을 조금 벗어나면 더 좋은 조망을 확보할 수 있다. 산허리를 잇는 임도를 따라 40분 정도 걸으면 온전한 숲길로 들어선다. 이곳은 가을이 조금 먼저 찾아왔다. 아침이슬이 살포시 내려앉아 마른 땅을 적셨다. 그러고 보니 절기는 이제 이슬이 내린다는 상강(霜降)을 지났다.

 

 

#. 남편과의 사별, 감성을 깨우다
오솔길의 끝, 가옥이 보인다. 전혀 뜻밖의 풍경이다. 성난 개들이 우렁차게 짖는다. 그 위압감에 멈칫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 할머니가 개들에게 몇 마디 던지자 이내 어디론가 사라진다. 서태지를 닮은 이 할머니.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처럼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렇게 외진 산중턱에서 혼자 사시는 것만 봐도 뭔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위청동 마을의 터줏대감 마님이시다.

 

- "60년 동안 여기서 살았지."
낯선 사람과의 첫 대면에서도 여유 있게 응대하시는 모습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간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이 할머니는 몇 해 전 TV를 통해 소개되면서 대청호 오백리길 12구간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올해 여든이라고 소개한 김봉난 할머니는 스물넷에 이곳으로 시집와 평생을 살고 있다. 고향은 저 멀리 포항이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 해 장학금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입학했다. 하나 대학교육을 받진 못했다.

 

 

할머니는 “지금처럼 기숙사라는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대학에 다닐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포항 처녀가 왜 이런 외진 곳까지 들어와 살고 있을까. 할머니는 웃으며 “첫 사랑에 실패해서”라고 수줍게 말을 꺼냈다. 포항에 있을 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는데 대학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 순간에 할머니의 평생 배필의 동생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옥천행 기차를 탔다.

 

- '내 남편은 농부'

김봉난 할머니는 그렇게 이곳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고 약 45년을 남편과 함께 살았다. 홀로 된 건 딱 9년 전이다. 2006년 강 씨 남편과 사별했다. 산골짜기에서 농사일로 5남매를 키워냈다. 똑똑한 어머니 밑에서 5남매 모두 잘 성장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모진 세월의 시름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소녀의 감성이 깨어났다. 50년 넘게 억눌려 왔던 자아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까? 그래서 어느 순간 펜을 들었다.

틈틈이 시간이 나는 대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의 순간순간을 되짚어 가며 소설을 썼다. ‘내 남편은 농부’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원고는 다 완성이 됐는데 아직 출판은 안 됐다. 지금도 겨울 농한기엔 손편지를 쓴다. 국문과 여대생의 감성이 이제야 꽃을 피운다.

 

#. 싱그러운 청보리… 넘실대는 비단물결

12구간의 푸른들이 청보리를 얘기하는 건 줄 몰랐다. 알았다면 봄에 이곳을 찾았을 거다. 그래도 12구간에선 그 모습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이 청보리 파종기다. 들판과 강변 사이사이에서 푸릇푸릇 자라나기 시작했다. 겨우내 움터 내년 봄엔 푸르게 자라 넘실댈 게다. 옥천 안남면 종미리와 연주리, 도덕리 일대에선 청보리 재배가 제법 많이 이뤄지고 있다.

농부 소설가 김봉난 할머니와의 수다를 뒤로하고 위청동에서 아래청동으로 내려온다. 여기도 감나무 천지다. 가을의 멋이 익어간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예전에 없던 다리가 새로 놓였다. 아직 정식 개통은 안 됐다. 원래 강변을 따라 가덕교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이 부분(3㎞)은 생략하기로 했다. 요즘 강변을 따라 도로 확포장 공사가 이뤄지고 있어 트레킹의 묘미가 떨어진다.

 

 

청마리는 대청호의 초입, 대청호의 최남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 역시 물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 강변도로가 아니라 그 아래로 걸을 수 있다. 강폭이 절반 정도나 좁아졌다. 강폭이 좁아진 탓인지 물살은 제법 거세고 요란하다. 그래서 호수라기보단 그냥 강이 어울린다. 금강(錦江), 이 비단물결이 굽이굽이 흘러 대청호에 모였다가 다시 서해로 빠져나간다.

 

 

새로 놓인 다리 아래에서부터 약 3.5㎞를 금강 따라 걷는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온갖 시름을 던져 버리고 유유자적 걷고 또 걷는다. 한 주 내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미세먼지도 이곳에선 덜하다. 연무만 끼었을 뿐 탁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대청호에 있다는 기분 탓일까? 아무튼 물결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고 그래서 발걸음도 가볍다. 뇌에서 ‘스톱(stop)’ 명령이 내려오면 발길은 자동으로 멈추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눈을 통해 마음을 씻는다. 푸른 비단물결에 ‘안구정화’ 또한 자동으로 실행된다.

 

 

몽글몽글해진 조약돌 위에 돗자리를 펴고 금강을 배경으로 풍류를 즐겨보기도 한다. 풍류에 술이 빠질 수 없다. 맥주 한 캔 시원하게 들이키고 금강의 경치에 취한다. 저 멀리 둔주봉 한반도 좌우반전지형 조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이곳 금강변을 끼고 병풍처럼 서 있는 산줄기가 바로 위에서 보면 좌우가 반전된 한반도 지형을 하고 있다는 그 산줄기다.

 

 #. 가을이 익어가는 시골마을 풍경

약 3.5㎞의 금강과 함께하는 풍류행을 즐기고 다시 마을로 진입한다. 종배리(從培里)와 미산리(薇山里)가 합쳐진 종미리다. 평촌삼거리에서 음지말을 지나 미산과 종배마을을 차례로 지난다. 추수가 막바지다. 황금들녘, 벼 베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미산과 종배마을 한켠에서도 역시 청보리가 푸릇푸릇 고개를 내밀고 있다. 청보리를 제외하면 온통 가을색이 완연하다. 울긋불긋 단풍이 마을을 수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배마을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정미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신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흙벽돌로 지어진 창고 하나가 감나무와 함께 운치를 살린다. 종배마을에서 나와 안남면사무소로 가는 길. 여기 가로수는 특이하게 모과나무다. 옛말에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 못 생겼다. 그래도 못 생겼다고 무시할 수 없는 반전 매력이 있다. 차로 마시면 감기예방에 좋고 무엇보다 향이 좋아 천연 방향제로 쓰인다. 모과조림을 해서 정과로 맛 볼 수도 있다. 역시 도시가 아닌 시골의 가을은 모과처럼 향긋하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2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GPX파일 다운로드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