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오기 전에 ...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흥진마을반도 둘레길 + 방축골 길 + 내탑수영장길(5-1구간)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이 만들었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물이 빚어낸 이 현란한, 곡예 같은, 아찔한 풍경은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눈동자에 새겨진 흐린 가을의 대청호 풍경은 그 자체로 한 장의 그림엽서가 된다.
안개구름도 이 경치에 반해 산허리에 머물고 새들은 나란히 구름 풍경을 수놓는다.
아침의 고요, 이 긴장된 순간의 적막이 깰세라 조심조심 이 화폭에 발을 내디디니

비로소 힐링의 마법이 시작되고 어느새 복잡했던 머릿속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누군가 그랬다. “비가 내리면, 바람이 불면,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래, 오늘 그 느낌 그림엽서에 고이 담아 슬프도록 아름다운 대청호에 띄워 보내리.


만추(晩秋)의 향수를 달래려 부랴부랴 대청호로 달려갔다. 또 한 번 가을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운 날, 때마침 날씨도 흐리다. 역시나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건 흐린 날이 제격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스산한 바람이 우울한 마음 안에서 동병상련을 느끼며 모든 걸 희석시켜 준다. 늦가을의 정취에 취해보려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을 선택했다. 낭만이 있어서다. 낭만이라 함은 실현 불가능성을 강하게 내포한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현실성을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메마른 정서에 감성을 불어넣고 싶을 때가 바로 그때다. 낭만적인 가을 산책,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은 과연 어떤 낭만을 품고 있을까.



# .1 흐린 가을 아침의 고요 - 흥진마을반도 둘레길
대전 동구 신상동 신상교 아래 흥진마을 입구.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의 시작점에서 가볍게 아침 산책을 시작한다. 구름이 잔뜩 껴 하늘은 잿빛이다. 전날 비가 조금 내린 탓에 갈색 가을빛이 더욱 선명하다. 마을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꿈처럼 아득한 대청호가 쫙 펼쳐진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아침, 거울처럼 투명한 대청호는 잿빛 하늘도 왜곡 없이 그대로 투영한다. 안개구름이 대청호반을 모조리 휘감고 있으니 눈앞에 놓이는 건 신비로움뿐이다.

 

 

보면 볼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무릉도원에 홀로 선 느낌이랄까? 모든 상념이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 순간 생각 따윈 필요 없다. 그저 그 신비로운 고요함에 ‘나’를 맡긴 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접근해 본다. 대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고 모든 게 정지된 상황. 그런데 호수 한 가운데서 고니 한 쌍이 파장을 일으킨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물살을 가르자 이내 호숫가는 요동치고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가서려던 내 마음도 바로 무너진다.

 

 

다시 호반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명상을 방해한 고니 한 쌍은 어느새 안개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마을 입구 반대편에 접어들자 백골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름을 붙잡은 산봉우리,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 그 앞에 펼쳐진 갈대·억새밭과 대청호. 모든 게 완벽하게 어우러져 한 편의 시가 되고 그 시는 우울한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 흥진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나무 울타리에 무청이 나란히 걸려 있다. ‘겨우내 말린 시래기로 국 끓여 먹으면 참 맛있는데….’ 시래깃국에 대한 명상과 한적한 농촌마을 정취에 빠져들 때쯤 이번엔 닭이 “꼬끼오∼” 하며 분위기를 깬다. ‘오늘만은 이 아침, 이 고요한 기분을 깨지 않아 줬으면 좋으련만.’

 

 

 

#. 2  방축골- 섬들의 향연
대전 동구 신촌동 방축골은 대청호반의 오랜 명소 가운데 하나다. 특히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유명하다. 경관이 좋아서다. 물론 대청호반이야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경치 하나하나가 다 명화지만 특히 방축골에서 보는 대청호는 그중에서도 손꼽힌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꽃님이’(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압권이다. 특히 벚꽃 흩날리는 봄에 그렇고 석양에 물든 저녁이 그렇다. 대전의 수많은 커플이 이곳에서 ‘사랑’을 맹세했다. 지금은 ‘팡시온’이란 카페가 꽃님이식당의 역할을 대신한다.

 

 

가뭄 탓에 대청호 수위가 낮아지면서 방축골 섬들의 향연은 더욱 현란해졌다. 드러나지 않았던 땅이 드러나면서 더욱 새로운 모습을 선사한다. 그러면서 호수 반대편 3구간과 4구간이 더 가까워졌다. 개구리처럼 섬과 섬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대청호의 품에 안기고픈 충동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다. 여기선 ‘햄버거섬’이 참 이채로운데 물이 빠지면서 그 맛이 사라졌다. 원래 이 섬은 호수 면에 투영되면 완전 햄버거를 닮았는데 수위가 내려가면서 햄버거 패티 부분이 망가졌다.

 

 

요즘 방축골에선 반도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하기에 좋다. 물이 빠지면서 둘레길이 생겼다.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기에 안성맞춤이다. 최근엔 잘 다듬어진 전원주택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국적인 풍경도 엿보인다. 물론 여기도 마찬가지로 억새의 향연은 기본이다. 방축골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커다란 바위 탑 두 개도 우뚝 서 있는데 이건 천천히 산책하며 찾아보시길. 대청호 수질관리소에서 보면 좀 멀어 보이는데 생각만큼 그리 멀지 않으니 연인과 손 꼭 붙잡고 탑에 대고 소원을 빌어보길 바란다.

 

 

 #.3  대청호의 히든카드, ‘+α’ - 내탑수영장길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엔 ‘플러스 알파’ 구간이 딸려있다. 5-1구간 내탑수영장길. 공식 구간은 방아실 들어가는 길목인 와정삼거리에서 끝나는데 여기에 5구간의 히든카드가 숨겨져 있다. 바로 고해산이다. 꽃봉·방아실 들어가는 길의 반대편으로 향하면 된다.

와정삼거리에서 고해산 정상까진 약 2㎞다. 고도가 220m 정도밖에 안 되고 경사도 비교적 완만해 40분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고해산(苦海山) 표기는 지도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약해산’(若海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대청호가 마치 바다와 같다’는 의미에서다. 약해산이냐 고해산이냐에 대한 논란은 결국 고해산 쪽으로 정리된 듯하다. 국토정보지리원도 그렇고 오백리길 표지판도 고해산으로 쓰고 있다.

 

 

고해산은 산 전체가 소나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항상 푸르다. 능선을 따라 어느 정도 오르막을 타기 시작하면 서서히 좌우로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의 중심부에 더 깊숙이 다가서고 있다는 신호다. 정상부에 가까워지면 5구간의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포인트가 있다. 백골산 정상에서 느낄 수 있었던 다도해의 풍경을 이곳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고해산 정상에서 다시 반도의 끝으로 향한다. 30분 정도의 산행과 동시에 탑봉을 넘는다. 탑봉에서 내려오면 여기서부터 신세계가 펼쳐진다. 두 개의 봉우리를 넘는 탓에 심신이 지치지만 피로를 느낄 새도 없이 환희에 젖어든다. 인위적인 것 하나 없이 자연 그 자체만 숨을 쉬는 곳에서 대청호의 속살을 은밀히 보듬어 본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그 고독의 순간이 고스란히 환희로 치환되고 그 환희의 기쁨과 설렘은 ‘나’를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온전히 자연에 동화돼 완벽한 ‘쉼’을 경험한다. 구름에 억눌려 있는 해가 쭈삣 고개를 내민다. 돗자리 깔고 누우니 몸에서 광합성이 시작되는 게 느껴진다. 살아 숨 쉬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절경 앞에서 잠시나마 모든 걸 내려놓는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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