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파노라마,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다

산에 오르는 것은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함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더 넓은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을 경험하고 안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그렇다 치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변화가 생긴다.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하고 또 한없이 거대해지기도 한다. 전자는 대자연의 일부로서 갖는 원초적인 자아발견이고 후자는 자아발견에서 싹튼 호연지기다. 이 가슴 벅차오르는 본질로의 접근이 바로 산에 오르는 이유다.

산에 오르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는 일이기도 하다. 미지의 동경에 이르는 길이다. 산에 오르는 것만큼 무언가를 동경하고 또 금세 그 동경의 대상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것도 드물다. 그러면서 느낀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 그 선(線)은 얇기도 하고 두껍기도 하다. 의지의 문제다’라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했다. 사유(思惟)의 고요에서 피어난 황홀한 영감(靈感)처럼 산 정상을 향하는 것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일지라도 가치가 있다.

 

[ 대청호오백리길 ] 21구간
대청로하스길

 

#. 간절히 원하니 열렸네 : 첫눈과 함께
처음엔 걱정이 앞섰다. 대청호 한 바퀴라는 주제 앞에서 자칫 ‘지루함’의 덫에 걸리지나 않을까? 기우(杞憂, 쓸데없는 걱정)였다. 생각보다 크고 넓어서 놀랐고 그만큼 이야기 보따리도 풍성해서 놀랐다. 매번 새로운 모습,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어메이징(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신선한 충격은 온몸과 마음을 후벼 팠고 궁극의 힐링(healing, 마음의 치유)을 선사했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종합병원이요, 당신의 두 다리가 의사입니다.’ 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의 초입, 찬샘마을에 새워진 ‘대한걷기연맹 공인코스 제9호’ 기념비에 새겨진 이 문구가 그 어느 때보다 큰 공감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올겨울에 시작한 대청호 오백리길 여정의 마지막, 21구간 출발점에 섰다.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런 걸까? 애매하고 또 모호하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럽다. 왠지 이별의 길인 것만 같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아니란 걸 금세 깨닫는다. 새로움의 시작과 만나러 가는 길이다. 21구간, 대청호 오백리길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1구간의 시작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21구간, 청주시 문의면 문의대교에서 출발해 구룡산, 장승공원, 조정지댐, 대청호 로하스길, 대청댐까지 14㎞의 길이 이어진다. 구룡산 산행 구간 6㎞를 제외하면 평탄한 길이다.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간절히 원했다. 순진한 아이처럼. ‘대청호 오백리길 마지막 구간, 눈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원하니 길이 열렸다. 계획된 일정 하루 전,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것도 2015∼2016년 겨울시즌 첫눈이. 신록, 녹음, 단풍, 앙상한 가지…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은 대청호가 올해의 마지막 옷을 입어주셨다. 많이 아쉬울 뻔했는데 다행이다. 눈꽃 내려앉은 대청호를 공유할 수 있어서.

 

#. 추억의 파노라마 선율 : 삿갓봉을 향하여
문의대교 출발지점에서 ‘구룡산 1.9㎞’ 푯말을 따라 오른다. 워밍업(warming up, 준비운동) 할 새도 없이 오르막이 이어진다. 늘 푸른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설원이 한껏 겨울 정취를 자아낸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눈꽃들도 제법 화려하다. 산 정상인 삿갓봉은 해발 373m, 그리 높지도,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편인데 발걸음이 무겁다. 설경을 눈에 담기도 바쁜데 자꾸 땅을 쳐다보게 된다. 발바닥이 계속 미끄러진다. 눈과 낙엽의 마찰력이 영 ‘꽝’이다. 뒤로 넘어지면 큰일이다. 그래서 몸의 균형추는 자꾸 앞으로 쏠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발바닥은 마찰력 ‘거의 제로(0)’의 상태에서 춤춘다.

미끄러짐과의 사투 속에서도 등산로 옆으로 펼쳐지는 대청호의 풍광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보지 않고선 느낄 수 없기에 호반의 풍경을 알뜰살뜰 눈에 담는다. ‘대청호의 흔한 풍경’도 늘 새로우니 눈을 뗄 수가 없다. 1시간 남짓 지났을까.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돌탑과 ‘쉼’을 청하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삿갓봉 정상이다. 그리고 맞이하는 ‘용(龍)’ 한 마리.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그 기세가 다이내믹하다. 구룡산(九龍山)은 아홉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삿갓봉 정상에 서니 대청호의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첩첩산중, 그 사이로 대청호가 빼곡이 들어 차 있다. 역시 산은 물을 벗해야 하고 물은 산을 배경으로 해야 제맛이다. 현란하게 뻗어 있는 산줄기들과 대청호의 경계에서 추억을 발견한다. 대청호반의 모든 길을 섭렵한 탓에 그 경계(길)에 오롯이 새겨진 아련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깨어난다. 때론 고행이었지만 그래서 더 값지고 애틋하다. 대청호의 최북단인 문의수역부터 대전 쪽 최남단인 추동수역까지 대청호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 익살스러운 장승이 호위하네
삿갓봉에선 대청호반의 풍경 말고도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는 게 또 있다. 등산객의 길벗이 돼 주는 장승들이다. 삿갓봉에서 조금 내려와 서쪽으로 하산길을 타면 나무계단을 따라 수많은 장승들이 호위한다. 크고 작은 장승들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길을 안내한다. 삿갓봉 장승공원엔 이런 장승들이 약 500여 기가 세워졌다고 한다. 장승공원 유래비에 따르면 2004년 3월 5일 이곳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는데 이로 인해 인근 마을이 쑥대밭이 됐고 나무들도 속절없이 쓰러졌단다. 그래서 주민과 지역 기관·단체가 힘을 모아 쓰러진 나무를 깎아 장승을 세웠다. 장승이 뭔가. 이 땅에서 대대로 수호신 역할을 해온 상징물 아닌가. 폭설 피해도 ‘액’(厄)이라면 액일 터, 뭔가 액을 물리칠 새로운 기운이 필요했을 거다. 그것도 500여 기나 되는 장승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아마 천년만년 이곳엔 불길한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리라. 장승공원 곳곳엔 아이를 순풍순풍 잘 낳게 도와주고 병도 낫게 해준다는 삼신할머니와 복할머니, 산을 지키는 산신령 석상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토속신앙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곳이다.

장승공원에서 내려와 용방이들로 향한다. 진장골까지 장승들이 보살펴준다. 공원 쉼터를 지나 다시 산길을 오른다. 가파르지 않고 평탄하다. 오르막을 타다보면 나무줄기가 붙어 자라는 ‘연리목’도 발견하게 된다. 이 연리목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길을 잘못 든 거다. 구룡산 정상에서 약 4㎞, 전망테크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완공된 대청호 보조여수로가 눈에 들어온다. 솔밭유원지 표시를 따라 다시 하산한다. 하석리에 도달한다. 도로까지 내려와 이제부턴 대청호가 아니라 ‘비단물결’ 금강 물길을 따라 걷는다. 굽이굽이 대차게 흘러 대청호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서해를 향해 달려가는 물길이다.

 #. 물에 잠긴 고목은 말이 없고
대청댐 아래 금강을 사이에 두고 대전과 청주 땅이 나뉘어 있다. 청주 땅에서 조정지댐을 건너면 대전이다. 대전 쪽 금강 변엔 로하스길 해피로드라고 이름 붙여진 데크길이 나 있다. 예전에 도로밖에 없어 신탄진에서 걸어서 대청댐에 가는 길은 위험했는데 지금은 오롯이 금강과 벗하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이 데크길은 ‘로하스’ 열풍이 불면서 생겨났다. 웰빙과 맞물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LOHAS)에 대한 개념이 퍼지면서 걷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 요구에 맞게 생겨난 길이다. 요즘은 ‘친수구역’이란 말도 유행하는데 그래선지 해피로드 주변으로 작은 공원들도 속속 조성되고 있다. 금강변 친수구역의 백미는 역시 왕버드나무 군락지다. 금강물에 밑둥이 잠긴 신록(新綠) 가득한 버드나무와 물안개 핀 금강이 어우러진 풍경이 일품이다. 이 환상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수많은 사진애호가들이 봄철에 이곳을 찾는다. 물론 지금은 가뭄인 데다 가지도 앙상해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나름 호젓한 풍경을 자아낸다.

조정지댐부터 대청댐까진 대략 5㎞, 꽤 먼 거리지만 눈이 즐겁고 발길을 붙잡는 요소들이 많아 멀다는 생각이 안 든다. 시간에 쫓겨 차타고 달려와 잠시 머물다 가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들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홀려 넋을 놓게 만드는 힘이 이곳 대청호에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의 끝자락에서 이 모든 절경의 원인 제공자인 대청댐 앞에 선다. 그리고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만들어낸 풍경의 파노라마를 돌려 본다. 파노라마의 끝을 이어갈 또 다른 시작은 어떻게 펼쳐질까?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21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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