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의 우상’ 서태지(徐太志, 1972~)는 대중가요의 다양한 장르인 힙합, 록, 팝, 메탈, 전자음악(일렉트로니카), 음반(네이처 파운드) 분야를 선도해왔다. 그는 만능가수, 혁신음악가, 다능연주자, 총괄기획자로 가요계를 혁신한 융통합형 국민가수다.

서태지는 1972년 2월 21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이 정현철(鄭鉉哲)이지만 록밴드 ‘시나위’에 들어가면서 ‘서태지’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조부였던 연세대 음대 정희석(鄭熙錫, 1917~2002) 학장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동중학교 2학년(1985)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악기를 사서 5인조 밴드 ‘하늘벽’을 조직했다. 그가 서울북공업고등학교에서 학업보다는 ‘활화산’ 밴드에 입단하고, “사람들이 밟지 않은 가시밭길을 가련다”라며 자퇴했다. 연예계에서 학력 지상주의를 파괴한 결단이었다.

그는 1989년 18세에 신대철의 추천으로 시나위에서 베이시스트로 연주하다가 1년 만에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1991년 그는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3인조 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해 새 길을 모색했다. 1992년 3월 23일, 그는 20세에 최초의 힙합+랩+댄스 뮤직인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해 정식 데뷔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됐다. 그해 방송사 가요 프로를 석권하며 180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이에 힘입은 서태지는 1993년 6월 힙합과 국악을 융합한 2집 ‘하여가’를 발표해 국내 최초로 22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다시 그는 랩 메탈+태평소가락+발라드+댄스음악을 선보여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1994년 8월 그는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얼터너티브 록과 메탈 등을 선보인 3집 ‘발해를 꿈꾸며’를 발표하면서 보름 만에 140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무엇보다 그는 남북통일+교육개혁+마약복용 등의 사회적 이슈를 가사화해 음악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1995년 10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이한 랩 창법의 갱스터 랩 음악으로 가출 학생 이야기를 다룬 4집 ‘컴백홈’을 발표했다. 그는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는 얼터너티브 힙합과 펑크 음악에 기존의 패션 스타일이나 안무 등을 혁신해 240만 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가출 청소년들이 귀가하고 기득권자들이 자성하는 바람을 일으킨 ‘컴백홈’을 방송에서 부를 때 마이크 없이 립싱크로 공연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95년 12월 서태지는 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했다. 그러던 그가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방송을 끝내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1월 31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 없이 떠난다”라는 말과 함께 돌연 미국으로 떠나 사회적 충격을 안겼다.

잠정 은퇴 후 서태지는 미국에서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고, 1998년 7월 그는 “음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미국에서 메탈음악에 하드코어 록을 접목한 5집(솔로 1집) ‘Take’를 발표해 1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또 그는 2000년 9월 귀국해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메탈을 시도한 6집(솔로 2집) ‘울트라맨이야’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최초로 펌프록을 도입하고 후속곡 ‘인터넷전쟁’으로 관심을 모아 14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통산 1000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2004년 1월 서태지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감성코어’로 명명한 7집(솔로 3집) ‘Live Wire’를 발표해 50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고, 러시아·인도·미국·일본·중국 등을 비롯한 해외 유명 뮤지션과 합동 공연을 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2009년 6월 8집(솔로 4집) ‘Atomos’를 발매했고, 2014년 10월 9집(솔로 5집) ‘고요한 밤’의 드라마 버전 뮤직비디오도 공개했다.

서태지는 한국인의 최초+최고+최대+최다+최장+초유+유일의 100여 가지 기록을 수립한, 1990년대 대중음악과 동시대 한국문화를 혁신한 가요 혁명가로 불린다. 그는 음악성+상업성+대중성에 지속적인 변화와 쇄신으로 K팝 문화의 새바람을 일으킨 ‘문화대통령’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공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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