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영국계 캐나다의 지체장애인 의료선교사로서 일제의 탄압과 제암리교회의 참상, 한민족의 투쟁을 세계에 알린 ‘3·1운동의 제34인’이 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수의학자+세균학자+수의사+수필가+저술가로 융통합적 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의 독립과 한국의 발전에 헌신한 그는 한국을 조국처럼 사랑하고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애국지사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외국인 최초의 독립운동가다.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의 워릭셔주 럭비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다. 1905년 고교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그는 체셔주의 한 농장에서 식생활을 해결하면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했다.

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 토론토대학교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1910년 소아마비를 앓는 불운을 겪었으나 이듬해 끈질긴 노력으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세균학 및 병리학 교수가 됐다.

1913년 9월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와 결혼한 그는 제중원장으로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한 올리버 알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1916년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위생학을 강의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7년 선교사 자격을 얻기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고, ‘돌처럼 단단하고 호랑이처럼 무섭게 한국인을 돕겠다’라는 뜻의 석호필(石虎弼)로 개명했다. 그는 한국의 많은 저명인사와 교류했는데 기독교 사회운동을 펼치는 YMCA 총무 이상재를 존경하고 김정혜를 수양 어머니로 섬겼다.

1919년 스코필드 박사는 미국의 친구로부터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해 이승만·안창호 등이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에게 “본국에서도 모종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언질을 줘 3·1운동을 촉발시키면서 해외 정세를 파악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르는 민중들과 일본 경찰의 탄압을 기사로 작성해 해외에 알렸다. 4월에는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현장을 찾아 ‘제암리와 수촌리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1919년 5월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영자신문 ‘서울 프레스(Seoul Press)’에 서대문형무소에 관한 글을 게재했다. 당시 그는 서대문형무소 여자 감방 8호실에 갇혀있던 노순경·유관순·어윤희·엄영애 등을 면회한 후 일본 총독에게 비인도적 만행을 중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가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던 건 영일동맹(英日同盟)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 측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20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3·1운동 견문록을 썼다. 그해 4월 일제가 강도로 위장해 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고 강제 추방시키자 캐나다로 귀국한 그는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강연을 하거나 언론에 기고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만방에 알렸다. 이처럼 그는 캐나다에서도 한국인을 열심히 도왔고, 1926년 이후 수시로 방한해 식민지 참상을 목도했다.

1958년 대한민국 광복 13주년 기념식 및 정부 수립 10주년 경축식에 국빈으로 대통령 참석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의 역사적 기록과 사진을 기증하기도 했다. 캐나다에 일시 귀국해 집안일을 정리하고 1959년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독재정치에 대한 글을 쓰고 교육을 장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교수한 연유로 ‘스코필드홀’이 남아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1970년 4월 12일 81세를 일기로 그가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자 정부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국립서울현충원에 고인을 안장했다. 지난 22일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의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발족되는 등 그는 ‘영원한 한국인’으로 살아있다. <공주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